제목 | 로마서4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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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2-06 | 조회수27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2. 6. (화요일) 로마서4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로마16,25-27) 25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니다. 26 그 진리는 이제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27 이러한 능력을 가지시고 지혜로우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하려는 로마서는, 로마서를 마치고 에필로그입니다. 후기 같은 것, 전체적인 개관, 그런 결론, 이런 것들을 나누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이해와 어떤 균형 같은 것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논하려면 구원이 필요한 대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게 인간이고 죄(罪)죠. 죄는 뭔가? 세상은 양심과 도덕에 관한 문제가 되고, 우리 그리스도교인에게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것, 거부한 것, 그것이 죄(罪)죠. 그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가야 된다’라고 이게 명확하게, 분명하게 설명한 것, 그러나 그 내용은 좀 더 이해해야 하는 것, 죽은 다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생전에도 적용되는 그 구원에 관하여 로마서가 크고 깊은 설명을 했지요. 그 설명을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으면 많이 손해를 봅니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 신앙생활을 하느냐 안 하느냐,’ 이렇게만 물어보면 말하자면 절반만 사는 게 됩니다. 믿는 게 있고 안 믿는 게 있고, 순종하는 게 있고 불순종이 있고, 둘로 나뉘는데 그것보다 더 큽니다. 그것이 사실은 로마서가 그려낸, 전하고 싶은 구원이라는 데 대한 성경적 설명이죠. 우리의 이해는 긍정적인 부분을 분명히 하려고, 부정적인 그 대비를 하다가 그 넓이에서 반으로 스스로 좁혀지고 나는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누구나 예외 없이 자연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이 현실에 평생 매이는데, 그 현실이 뭐냐 하면, 자연입니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육지가 있고 하늘이 있고 밤이 있고 낮이 있으며 그리고 시간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는 이 분명한 현실에 있습니다. 모두에게 예외 없이 동일한 컨텍스트 속에 있죠. 그리고 이 세계라는 시간과 공간은 ‘인과 법칙’이 제일 원칙인 세상입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내며 얻고 싶은 결과는 그 결과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해야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원인은 제공하지 못합니다. 세상도 우리도 죽기는 싫은데, 죽음은 실패인데, 죽음을 면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자연 법칙에 순응하자’고들 많이 말하죠. 일반 종교나 또 일반인들은 체념하여 수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죗값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외 없이 죽는다’고 합니다. 자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이해의 틀을 가져야 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걸 왜 만드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인류를 만드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는데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순종하지 않기로 거부하는데 그 자유를 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이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죠. 그들은 카인이라는 아들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카인이라는 자식의 이름을 지은 것은 ‘우리가 생산했다,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 우리가 죽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애를 얻었다’라고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그런데 그 카인이, 인간이 한 거부권을 DNA로 가지고 있더라는 거죠. 동생을 죽입니다. 인류 역사는 그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죽는데 애를 낳고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은 죽이는 DNA를 갖고 태어나며 그리고 죽습니다. 운명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 속에, 인과 법칙의 사실, 태어나는 사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실 속에 어느 힘이 가장 큽니까? 우리가 역사에서 보는 것은 죽는 것이 가장 큽니다. 죄가 가장 큽니다. 죄가 그러면 생명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죽음을 만들지 생명을 만들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느님만이 만드십니다. 그럼 죄는 하느님보다 큰가? 아니면 하느님과의 죄 사이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 하느냐의 문제인가 라는 것이 되겠죠. 하느님은 이렇게, 이 세 가지 사실을 역사에, 세계에 담아놓고 아직까지 일하고 계십니다. 로마서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펼치는 배경입니다. 자, 어떻게 될 것인가? 죄가 끝까지 승리할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행사한 거부권을 철회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느님은 두고만 볼 것인가? 어떻게 개입하실 것인가? 거기에서 하느님이 일하셨다 라는 거죠. 하느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인간이 선택한, 자초한 멸망을 두고 보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뛰어들어와 역사 속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예수로 완성하셨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사실 천국에 갈 때까지는 이 세상 속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하느님이 우리가 원하는, 보이는 컨텍스트로 이 승리와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격과 보이는 기계적인 방법이나 규칙 같은 것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격과 의지로 이 일을 합니다. 구약 내내 약속으로, 신약을 시작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요. 그 이후로는 믿음으로 그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말하자면 자연주의에서 신앙으로 들어오는데 커다란 그 문턱이 있지요. 하느님이 이런 방법을 택하신 가장 큰 이유가 뭘까? 인간 보고 자기가 선택한 게 무엇인가 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선택한 게 뭔가? 우리가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하느님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인류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한탄과 탄식과 거부와 부끄러움은 언제나 이겁니다. 우리가 한 짓, 아무리 명예로운 것으로도 명예를 만들 수 없는 인류, 그것이 역사(歷史)지요. 멋있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기막힌 인간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멋있는 얘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걸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을 제시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사람을 살리거나 없는 존재를 내게 생명을 부여하지 못하면 그 말을 하는 것으로 명예롭지 않습니다. 힘이 되기는 해도, 고함이 되기는 해도, 우리가 잘 아다시피 지성은 멋진 것이지만, 지위는 대단한 권력이지만, 그걸 가져 보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진실로 위대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위대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 거기에 나옵니다. 위대한 것은 그 무엇이다. 거기까지밖에 말을 못해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 세상은 만들 수 없는 것, 모든 위대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을 하느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얘기할 필요 없이, 인류 모두가 역사 속에서 과거를 돌아볼 것 없이, 자신의 존재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어려울 때 말하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이기면 나아 보이세요? 아니요. 인간은 전혀 위대한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당합니다. 마태오복음 순서로 얘기를 하죠. 돌로 빵을 만들어라.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얼마나 얼마나 고마운 말입니까?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얼마나 고마운 선언입니까? 우리 이렇게만 듣지요. “야 똑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앙이 더 중요한 거야.” 이렇게 우린 이분법으로 가자, “넌 쳐먹기만 하고, 봉사는 안하냐?” 이런데 인용을 하잖아요. 돌로 빵을 만들어.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빵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거 이상이다. 그것 때문에 왔다. 그 이상이다. 고마운 말씀이죠. 아시겠어요? 너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천사를 보내어 받아줄 거야. 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느님은 해결사가 아니다. 너희들의 차원과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 해결하는 정도가 아니다. 너희들이 상상 못하는 높고 깊고 귀하고 위대한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고마운 말씀이죠. “엄마 저거 사줘.” “내가 저 고급 빵집에 들어가서 주스 사줄게. 길거리에 있는 거 사먹지 마.” 그러는 거죠. “땅에 떨군 거 집어먹지 마.” 그러는 것과 같습니다. “내게 절하면 다 주겠다.” 그래 “이 보이는 것의 싸움인 줄 알아? 거기 뭘 담느냐의 싸움이야! 해 봐! 내가 걸어 들어갈게.” 이렇게 됐죠. 못 알아듣는 표정이네요. 고린도전서 13장에 가면 이 일들에 대한 세 번째 시험의 답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나옵니다. (1코린13,1-3) 1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가 보세요. 환상, 그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내용이 아니랍니다. 능력, 그거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인간의 가치는 능력 같은 것으로 쉽게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열정이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인간은 그것보다 크답니다. 뭐랍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란다. 그걸 하러 오셨죠. 율법이 뭡니까? ‘내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단히 가르치셨죠. 사랑입니다. 사랑은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이뻐 흘리는 거 아닙니다. 그러는 게 사랑이 아니라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실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존재가 돼야 됩니다. 뺏으려고만 하죠. 이용하려고만 하죠. 이해관계 외에 뭐가 있습니까? 제일 큰 실수가 뭐죠?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없는 자는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상대가 가치가 없다구요? 천만에요. 4절에,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무슨 뜻이라 그랬죠? 오랜 고통이라 그랬습니다. "가치 없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이 얘기합니다. 그 사람 내 마음에 안드는 것 존중해라. 어떻게 하실래요? 존중해라. 하느님이 만들었다. ‘니가 내 앞에서 귀하듯이 그가 내 앞에서 귀하다. 너 그에게 잘해라. 너 멋있게 굴어라.’ 사랑이랑 다르죠. 앞에 있었던 모든 자연주의에서 나왔던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말하자면 이런 자랑들 능력, 대의, 유용성, 윤리, 승복, 이런 것들과 얼마나 달라요? 예수님이 그걸 증명하시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지요. 말로만 죽으시거나 각오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가 증언하듯이 피 흘려 돌아가시지요. 피 흘려. 우리 사람들이 말로만 아첨하면 이 말하죠. “니가 나한테 밥 한 번 산 적 있냐? 날 위해서 울어본 적 있냐?” “나 너 위에서 피 흘렸다.” 그 말이에요. 피 흘려준 것이죠. 그러면 윤리니 도덕이니 노력이니 이런 건 왜 있는거야? 그것이 있어야 이것이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긴 길을 하느님이 열어놓고 기다리시고 만드십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늘 오늘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일을 당겨 살 수가 없고 어제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근데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 없으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오늘이 없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구체적으로 오늘이라는 국면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어제 한 일이 오늘로 영향을 미치고, 오늘이 내일에게 결정타를 가할 겁니다. 그 오늘을 삽니다. 공간 속에 갇혀, 니가 아니고 그도 아닌 나로 살지요. 나, 그래서 내 자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규칙, 원칙, 시간, 공,간 정황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릇이 없이는 담을 수가 없는 것 같이, 끝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내용은 아니라 그랬죠. (필리3,10-14)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뒤돌아보면 “아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 이렇게 분명한 하나의 연속선으로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억이 파편처럼 끊겨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저로서는 뭐 4.19, 5.16, 무슨 5.18 이렇게 뚝뚝뚝뚝 잘려 있습니다. 그렇게 뚝뚝뚝뚝 잘려있죠. 컨텍스트 속에 있었죠. 열심히 살아야 하고, 내가 하지 않은 정황에 몰려 있는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됐고, 어떤 건 후회스럽고 했지만 하느님이 담은 것은 이상한데서 은혜를 담아 나를 만들었습니다. 컨텍스트와 텍스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거기서 그 일을 하셨을까? 그러나 그 컨텍스트가 있어서 이거죠. 그래 그때 피정 갔을 때 거기서 받았어. 그때 하느님을 만났어. 그 피정 가면, 다시 그 내용이 반복되나요? 아니요. 아니라는 건 많이 보셨죠. 그러나 그 컨텍스트가 없으면 막막하지요. 구별이 안 되지요. 인식하고 정리하고 누적시킬 수가 없죠. 바오로가 그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왜요? 그건 하느님이 담으시는 거다. 그때 내 몰린 자리, 그때의 정황에서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면, 하느님이 어디다 어떻게 묶을지 그건 하느님 손에 있다. 난 오늘을 산다. 내일은 아침에 하느님이 날 깨우면 살 것이요, 아니면 주님 앞에 서리라. 이렇게 돼 있는 겁니다. 결사각오와 달랐습니다. 이걸 잘못 썼다 이거지요.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자신 있어?” 이렇게 쓰는 바람에, 정작 가져야 할 텍스트를, 그 장렬함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고요. 그 장렬함은 중요합니다. 그걸로도 더 내용을 채워야 됩니다. 금고를 열었더니, 열리질 않더래요. 몽땅 쇠덩어리더래요. 그럼 돼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지으면 섭섭하죠. 금고가 쇠로 된 건 단단하고 보호해야 되지만, 안에 뭐가 들어있을 공간이 있어야죠. 그렇죠? 여러분들의 인생이 여러분이 가진 신앙적 단단함, 현실적 단단함이 다가 아니라, 그 단단함 속에 하느님이 무얼 담으시는가 보세요. 예수 안에 뭘 담았는가를 보세요. 죽음을 반전시킬 수 있다. 뭐가 겁나냐?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우리가 선택한 죄와 죄가 가지는 권력, 모든 인류의 죽음이라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죄가 제일 큰 권력을 가진 것 같았죠. 예수 안에서 아니다. 하느님이 제일 크시다. 뒤집을 수 있다. 그러면 왜 이 고통스러운 일을 반복하십니까? 너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봐라. 그 무서운 걸 왜 보게 하세요. 그리하여 너희에게 준 자유의 진정한 가치와 긍정적 특권을 누려라. 너희가 누려라. 너희가 선택하여 네 것으로 가져라. 그렇게 요구한 거죠. 죽어서 천국 가기 전에 예수 믿거든 당장 어느 부분에서든 달라야 된다 이겁니다. 죽어도 돼. 그거 제일 컸죠. 오늘 죽어도 돼. 좋습니다. 살려놓으면 죽으면 쉽죠. 은혜 받고 다 죽으면 제일 쉽죠. 죽는 거 말고 살아있으면 어떻게 할래요? 사랑하세요. 사랑을 받으세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넉넉하세요. (에페3,14-21) 14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15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16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대하게 부르셨습니다. 그 구원을 알고 자랑하며 사는 인생 되게 하여 주소서. 못난 자리에 서지 말고 살리고 품는 거 나누고 주고 주님의 크신 이름으로 자랑하는 인생 되게 하셔서 우리를 만나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을 나누는 기쁨과 기적이 있는 인생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이 온누리에 펼치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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