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5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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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2-09 | 조회수255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 7,31-37 "'에파타!'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만약 듣지 못하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중에 딱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감각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하고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앞을 못보는 장애우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장애우의 행복지수를 비교해보면 시각 장애를 가진 분이 더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타난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헬렌 켈러가 남긴 이 말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지요.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제대로 듣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와 편견,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에는 귀를 막는데서 생기는 갈등, 제대로 듣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해석을 덧붙여서 생기는 왜곡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분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상처를 안고 살게 되지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상처, 진짜 내 모습 내 생각이 아닌 것으로 인해 오해받고 미움받는데서 생기는 상처,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받고 배척당하는데서 생기는 상처들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외딴 곳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다른 병자들에게는 해주신적 없는 아주 ‘특별한’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가 제대로 듣지 못함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그만큼 깊고 심각했기에 특별치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기능’상의 장애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어 이해와 소통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그의 마음 상태가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치유의 과정을 마치신 후 그에게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이해’의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길의 끝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구원’의 문, ‘희망’의 문, ‘행복’의 문을 활짝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어야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든 귀막고 사는 귀머거리, 입 닫고 사는 벙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고집만 피울 때 우리는 독단의 ‘귀머거리’가 됩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은 구구절절 잘도 말하면서 타인에 대한 칭찬에 인색할 때, 우리는 부정의 ‘벙어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려고 할 때 방종의 ‘귀머거리’가 되고,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땐 청산유수면서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데 인색할 때, 우리는 배은망덕의 ‘벙어리’가 됩니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듣고 듣기 거북한 말은 못들은척 할 때, 우리는 감탄고토의 ‘귀머거리’가 되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비겁자라는 ‘벙어리’가 됩니다. 이런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들은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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