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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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2-12 | 조회수19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24년 02월 12일 월요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뎌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 차갑고 어두운 밤, 불확실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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