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야고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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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2-12 | 조회수15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야고1,1~11)
4세기초 에우세비우스는 바오로 서간에 이어지는 서간 일곱개, 곧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1,2,3서, 그리고 유다서를 가톨릭 서간이라 불렀다. 여기서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서간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에 보내졌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전형적인 권고서한에 속한다. 명령형 동사가 자주 쓰인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서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이신득의 ; 以信得義)와 달리 행동(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에 M. Luther는 이 서간을 다른 신약성경 책들과 비교하면서 "복음적 특성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지푸라기 같은 서간" 이라고 깎아 내렸고,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개신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질이 낮은 경전으로 평가하였다.
19세기의 역사 비평가들은 이 서간을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던 두 경향, 곧 바오로적인 경향과 유다교적인 경향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 문헌으로 보았다. 가톨릭에서는 주로 병자성사의 근거를 제시하고(5,14-15),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2,14-26) 이 서간을 이용하였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야고보서의 집필 목적을 연구하면서부터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야고보서가 집필되던 당시 교회 상황이 사도 바오로가 믿음을 통해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 교회내에 편만한 상태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개신교 성도들이 그 '믿음으로서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복음을 관념론으로 변질시켜 믿음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신앙 행위와 분리시켜 버렸다고 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면 땀을 흘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앙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본다.
특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동'(행함, 실천)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 '에르곤'(ergon)이 바오로 서간 중 테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행위'를 표현할 때도 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거기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당연히 그 믿음으로부터 '에르곤'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따라서 '이신득의'를 말하는 바오로의 사상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칭의' ; 야고 2,24)을 말하는 야고보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야고보의 사상이 그 뿌리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야고보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과 내용을 지닌 만큼 독립적으로 다루는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야고보서의 내용은 결코 가볍거나 진부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만큼 사회의식이 뚜렷한 경전도 없을 것이다. 이 서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도 사도적 기원의 취약성 때문이지 결코 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1,1)
여기서 야고보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배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 <장(長)야고보 ; 마르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차(次)야고보 ; 마르3,13>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12,17 ; 15,13 ; 1코린15,7 ; 갈라1,19 ;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이물은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였고(사도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세번째로 거론하는 야고보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다(마르6,3 ; 마태13,55).
고대의 테르풀리아누스는 신약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와 요셉이 첫 아들 예수님 다음에 낳은 아들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성모님과 성요셉의 (평생)동정을 부정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야고보를 주님의 사촌으로 여겼던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 따라 그들을 예수님의 사촌 육촌 팔촌등 가까운 친척으로 본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열두 사도단과 구별되었다(사도1,13-14 ; 1코린15,5.7).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로 통한다(1코린15,7 ; 갈라1,19).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동반하지 않고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머물러 있었다(마르3,21.31-32 ; 6,1-4).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만큼 그분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고(1코린15,7), 그 뒤 예루살렘 모교회가 창립될 때 원로단의 대표가 되었다(갈라2,9 ; 사도12,17 ; 15,13-22 ; 21,18).
야고보는 A.D. 60년대 초에 순교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총독이 없는 틈을 타 대사제 아나누스 2세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메시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율법 위반자로 몰아붙여 돌로 쳐 죽였다(유다 고대사 20,9.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야고보서는 저자가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서간이다. 그리고 이 서간에 인용된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이다. 아마도 저자는 야고보의 제자이거나 추종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인물일 것이다.
그 다음 이 서간의 인사말에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는 누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흩어져'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을 통해 널리', '쪼개고 들어가는', '관통하는' 이라는 의미의 전치사 '디아'(dia)와 '흩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페리오'(speri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분산', '흩어진 자'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신약성경에서는 세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요한7,35 ; 1베드1,1).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뒤에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신앙을 지키며 흩어져 살아왔던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본문에서 팔레스티나 밖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다인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에 신앙의 박해로 인해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사실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 밖으로 흩어졌으며(사도8,1),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고보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본 서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4)
'시련'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모이스'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heirasmos)는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 '시험'이란 표현은 '시련'과 '유혹' 모두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유혹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켜야만 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시련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내적인 욕심으로 인한 시험이라기 보다는 외적인 고난으로서의 시험이란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여기서 '갖가지 시련'에서 '갖가지'라는 표현은 종류가 다양하다의 의미의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삶의 모든 영역 어디에서건 뜻하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위협적인 시험에 직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0,19 ; 2코린11,23-28).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2)
'빠지게 되면'으로 번역된 '페리페세테'(pheripesete)는 '~주위에'란 뜻의 전치사 '페리'(pheri)와 '빠지다'(마태15,14), '넘어지다'(마태17,15)란 의미의 동사 '핍토'(phipto)의 합성어로서 '~에 에워 싸이도록 빠지다', '~에 빠져 에워 싸이다' 란 뜻을 가진 '페리핍토'(pheripipto)의 가정법 동사이다.
이 동사는 성도들이 시련들을 일부러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련들이 느닷없이 예기치 않게 닥쳐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가정법 동사 '페리페세테'는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호탄'(hotan; '~할 그때에는')과 함께 쓰였다.
여기서 '호탄'은 여러 번의 반복적 동작이 일어나는 때를 묘사하므로 시련의 닥침이 일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자꾸 반복적으로 닥쳐왔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왜 그것을 전적으로 기쁘게 생각해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본문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 (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고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면',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확고부동함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취되는 것이다.
'생겨난다', '만들어 낸다'는 뜻의 '카테르가제타이'(katergazetai)가 '카테르가조마이'(katergazomai)동사의 현재형이란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희랍어 동사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8)
간구하는 자의 마음 상태가 간구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의심하지 않는 것'(6)이다. 의심없는 태도만이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이것이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믿음일 것이다.
'의심하다'라는 '디아크리노'(diakrino)동사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다', '주저하다', '망설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두번씩이나 연속 사용함으로써 의심이란 주제를 강조했다. 특히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비유를 통해 시각화시켰으며,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의심의 위험성과 더불어 의심의 성격이 액체와 같이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이내 요동치며 험상궂게 변모해 버리는 바다의 물결은 참으로 그 잔잔함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 물결의 비유는 의심의 규모가 바다처럼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단 하나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의심이 지니는 여러가지 부정적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6절의 이러한 '의심하는 자'가 바로 야고보서 1장 8절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안정을 찾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은'으로 번역된 '딥쉬코스'(dipsichos)는 '두 번'이란 뜻의 '디스'(dis)와 '마음', '영혼'이란 뜻의 '프쉬케'(psche)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두번의 마음' 이나 '망설이는', '동요하는', '의심하는' 또는 '시련의 때에 특히 더 필요한 믿음의 일관성과 결의가 부족한' 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으로서 일관성있는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 그 두번 다 야고보서에서만 나타나고 있다(야고4,8).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9-10)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당당하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권면의 내용이다. 야고보서 1장 9-11절은 앞의 단락과 내용상 연결되는 것으로서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높여 주신다는 믿음으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부자는 그의 부요함이 영원 무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믿음의 시련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자신이 가난하고 상황이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기가 꺾이거나 주눅이 들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환경과 세상적 평가에 의하면 이들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영광스럽고 존귀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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