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깨달음 예찬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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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2-13 | 조회수240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뿐이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사랑,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시편37,3)
"괜찮아 힘내!" 제가 고백성사후 보속시 말씀 처방전에 자주 찍어 드리는,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하는 스탬프의 말마디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의 은총에 깨달음의 사랑이요,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살아있는한 계속되어야할 깨달음이니 말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이 끝날 때 곧장 꼰대가, 부패인생이 뒤따르고 치매가 들어올 것입니다. 깨달음 역시 성령의 은총임과 동시에 부단한 의식적 훈련입니다. 모든 종교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강조되는 바 깨달음입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맹자의 말씀도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합니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짜임새 있게 담아 낸 것이 간결함이다. 그래서 간결함의 유의어는 단순함이 아니라 탁월함이다."-다산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 요점을 말하기 위함이다."-맹자
불교 고승들의 깨달음을 노래한 무수한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들의 시입니다. 옛 선비들의 한시(漢詩)들, 옛 사막교부들이나 불교 선사(禪師)들의 일화들 대부분 깨달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문득 공자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가 수도생활중 무수히 쓴 시들 대부분 역시 깨달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중 "하늘"이라는 짧은 자작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하는 시공을 초월한 진리가 깨달음의 시적(詩的) 진리입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의 교과서란 칭하는 우리의 시편집입니다. 참 기쁨도 참 행복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깨달아 알아갈수록 참 나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구원의 참 기쁨이요 참 행복입니다. 참으로 내적 성장과 성숙의 삶은 깨달음의 여정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인간을, 자연을, 주변의 관계되는 모든 현실을 깨달아 알아가면서 자유로워지고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깨달음과 더불어 내적치유이자 자유로움이나 깨달음의 여정은 그대로 치유의 여정, 힐링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대부분 인간 불행이나 비극은, 병고는 무지에서 기인하는 바 무지의 힐링에 깨달음의 약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이라 함도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도 결국은 깨달음의 지혜를 위한 공부임을 알게 됩니다. 지식 축적에만 끝나는 헛된 공부가 아니라 지혜로 전환되는 공부가 참 공부입니다. 공부의 기쁨, 배움의 기쁨은 깨달음의 기쁨으로 이어져야 참 공부, 참 배움입니다.
수도자들이 하루하루 평생 매일 바치는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 거의 모두가 깨달음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매일 깨어 노래로 바치는 이런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야 말로 참 좋은 깨달음의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깨달음의 선택과 은총에 이어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습관화보다 이상적인 영적 삶도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이러니 깨어있음, 깨끗한 마음, 깨달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깨달음의 훈련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공동전례입니다.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반복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과도 통하니, 치매 예방에 이보다 더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반복의 훈련이 진리이자 답입니다. 영성생활도 반복의 훈련으로 요약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반복의 훈련에 충실해야할 기도요 공부요 노동이요 수행입니다. 단순한 생각없는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이기보다는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깊어지는 반복입니다. 이래야 멋지고 아름다운 정주의 삶에 영성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달음이요 깨달음 예찬의 강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우선적 필수적 요소도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만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훈련이, 깨달음의 기쁨이 사라질 때 서서히 꼰대가 되고 치매가 오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고 참되고 아름답고 놀랍고 사랑스럽고 새로운지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대부분 시편들입니다. 새삼 성서의 예언자들을 비롯한 우리 예수님,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 한결같이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당대의 무지한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자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입니다. 이래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이라, 이 거룩한 미사은총뿐이라 고백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도 명심해야 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누룩으로 인한 악취나는 부패인생의 전개입니다. 한결같이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향기좋은 발효인생이 됩니다. 깨달음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얼마전 빵의 기적을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하고 수군대는 제자들에 대한 참 스승 예수님의 질책이 고맙습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빵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빵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배불리 먹였을 때 얼마나 남았었는지 다시 환기시키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거듭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깨달음을 촉구합니다. 이런 일련의 배움의 과정을 통해 제자들의 깨달음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 스승 예수님께 그 제자 사도 야고보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주석같은 제1독서 야고보서간에서 보다시피 야고보가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총하에 얼마나 치열하게 깨달음의 공부에 전념했는지 사도의 깨달음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복음에서 무지하다 꾸중받던 제자들중 예전의 야고보가 아닙니다. 약간 과장하여 청출어람(靑出於藍: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가르친말)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시련과 유혹에 대한, 또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야고보 사도의 명쾌한 해명의 지혜가 참 멋집니다. 시련(試鍊)을 전화위복의 시험(試驗)의 계기로 삼으라는 말씀은 얼마나 위로와 도움이, 힘이 되는 지혜로운 말씀인지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유혹하지도 유혹받지도 않으시며 유혹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욕망 탓임을 또 명쾌히 밝히시는 현자 야고보 사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이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말론적 죽음, 영혼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참 좋은 지혜의 처방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께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불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뜻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뿐임을, 더 분명히 하면 예수님뿐이요 이 거룩한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진리의 말씀, 복음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영적으로 새롭게 낳으십니다.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시편37,4).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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