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비장한 각오로 재의 수요일을 맞이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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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2-14 | 조회수24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대한 설명은 웬만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기본적인 설명을 또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비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재의 수요일의 원래 근본적이고 전례적인 의미에서 왜 중요한 것인가보다는 전체 신앙적인 측면에서 또 사순이 시작하는 첫 날이라는 의미에서 왜 중요한지 오늘 일하면서 끊임없이 묵상해봤습니다.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춰서 오늘 묵상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 교회에는 여러 가지 전례력으로 봤을 때 가장 의미 있는 전례가 몇몇 있고 또 그 전례에는 그 전례에 맞는 시기가 있습니다. 대략 사순기간은 전체 일 년 중 약 구분의 일을 차지합니다. 수리적인 개념으로는 구분의 일이지만 중요성 측면에서는 어쩌면 구분의 칠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정도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도 그냥 부활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물려받아 탄생할 때도 그 탄생이 축복 받은 탄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탄생도 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시각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령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후자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신앙을 한번 접근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고 해도 다 같은 부활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설명의 편의를 돕고자 완전한 부활과 불완전한 부활 이렇게 나누어서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부활을 논할 때 완전한 부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전제돼야 할까요? 잘 죽어야 합니다. 더 정확한 의미는 확실하게 죽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결론은 죽음이지만 이건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씀을 최소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 실제 이게 조금은 철학적인 말이라 얼핏보면 이해가 가지만 사실 가슴에 잘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이라는 그 측면에서만 죽음과 삶을 생각하면 이런 오류에 당연히 빠질 수밖에 없고 또 그 의미의 한계를 초월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자신의 삶 자체의 생명이 끊어짐을 이해하는 게 좀 더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 자체의 생명 하면 철학적인 의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곰곰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의 삶이라고 했을 때 그냥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만의 삶만을 생명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냥 개, 돼지와 같은 동물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우리의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의 의미를 초월한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죽음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가 전례나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 다음에 이루어지는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죽음이 이런 죽음이 될 것입니다. 정신 집중을 하지 않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단 하나의 말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 육신의 몸을 입고 있지만 실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육신의 생물학적인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수반되지만 그와 함께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우리의 육신에서 발하는 인성이 완전한 죽음에, 다시 말해 생물학적인 죽음과 같이 죽어야 그때 그런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활할 때의 몸은 인성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만약 인성을 취한 부활이 된다면 그건 부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 말입니다. 그저 인간 세상에서 말하는 표현으로 하자면 그냥 다시 살아났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을 보고 어떤 한 사람도 부활했다고 표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부활은 완전히 죽었을 때 이루어진다는 말이 정확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추론하면 어떻게 해야 완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인성을 죽이는 연습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인성을 죽이는 연습을 수도 없이 해서 완전히 인성이 죽었을 때 그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연습하는 것은 인간적인 본능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탐욕이 일어날 때는 그 욕심을 절제하고 탐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는 이타적인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가 일어날 때 사랑으로 미움과 시기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죽이는 연습을 철저히 해서 완전히 그런 본성을 제거했을 때 우리가 말하는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죽음 이후에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그때 부활이 완전한 부활이 될 수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를 완전히 이해를 한다면 사순시기를 우리는 어떻게 보내야 하고 또 사순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은 어렴풋이 이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해마다 사순이라는 전례는 반복이 됩니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전례력에 따라 이 시간만이도 철저히 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연습을 누가 얼마나 했느냐의 결과에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순탄할 것입니다. 그게 아주 순탄한 사람은 흔히 말하는 직천당이 될 것입니다. 그게 부족한 사람은 천주교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 연옥을 가는 이유와 연옥에서 단련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조금 영성적인 표현을 하자면 인성을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런 의미를 말할 때 연옥에서 단련한다고 표현을 하는데 아마 그런 의미와 동일하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사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상적인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엇이든지 처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첫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서두에 재의 수요일이 시작하는 첫날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원한 천국을 가고 싶고 하느님을 만나고는 싶어하면서 행동은 인간적인 본성을 죽이는 연습을 하지 않는 사람의 말로는 어떻게 될지는 제가 답을 내지 않아도 그냥 답이 나올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자면 우리는 이 사순시기를 철저히 인간본성을 죽이는 연습을 해서 매년 이게 반복이 되어 언젠가 그게 완전히 죽어지는 그날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곁에 있을 거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세상에서 쓰는 표현을 하자면 구천을 떠다닌다는 것처럼 우리는 죽어서도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찾아다니며 헤매는 신세가 되는 불쌍한 영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영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매년 있는 사순시기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남은 전례라고 하는 마음으로 배수진을 치고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사순시기를 보낸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때야 비로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영혼으로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고의 노력으로 이 사순시기를 은혜롭게 보내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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