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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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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6 조회수364 추천수7 반대(0)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황당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7년 여름에 저는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드다빈치 공항에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수속을 하였습니다. 창구의 직원은 저의 여권을 한참 보더니 벨을 눌렀습니다. 곧 보안요원이 왔고,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인종차별에 가까운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야 했고, 토론토에서 동창신부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것도 취소되었습니다. 토론토 도착시간이 밤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인 사람과 저의 인상착의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사히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더 오래 전의 일도 있습니다. 1993년의 기억입니다. 동창 모임이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에서 있었습니다. 다들 모였는데 한 친구가 밤이 늦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을 때입니다. 친구는 진부령과 진부를 혼돈했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있는 진부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친구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늦었지만 별 탈 없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황은 그 원인이 본인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97월입니다. 저는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그만 지갑을 놓고 내렸습니다. 지갑에는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신용카드, 현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은 따로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한국에 전화해서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은 새로 만들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남은 일정 얻어먹으면서 다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웃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고, 드디어 성지순례를 시작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2003년의 기억입니다. 자매님은 미국비자가 있는 구여권을 가져왔습니다. 구여권은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새로 발급받는 여권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집이 수원이었던 자매님은 부득이하게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그래도 순례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부주의와 나의 착각으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작이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름 부푼 꿈을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화려한 궁궐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축복하는 집에서 태어나기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물이 머무는 구유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 되었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난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고식치고는 무척이나 황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다.” 확실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황하셨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표징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표징은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십자가 없는 부활을 얻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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