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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를 따라라”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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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7 조회수202 추천수5 반대(0) 신고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름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에는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어제 수도형제들을 위한 금요강론중 마지막 한 구절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정주생활의 은총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자신과 함께 편안히 머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To be at home with oneself is indispensable for finding one’s identity) 

 

제자리에서 제대로 참나의 삶을 살 때 평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 또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도 읽어보는 2월17일자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이 새로운 감동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 구도자의 향기를 느낍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한결같이 정진하는,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다산의 준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전해져 옵니다. 

 

“군자의 도에서 어느 것을 먼저 전하거나 미뤄두겠는가? 처음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것은 오직 성인뿐이다.” 

 

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하루 영원을 살았던 참된 구도자 공자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 두 편도 소개합니다. 곳곳에서 주님을 찾는 ‘주님의 향기’같은 분들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드립니다. 아침엔 강론 말씀으로 배부르고 잠자리에서선 ‘둥근마음 둥근삶’으로 배불러 너무 행복해서 가슴뛰는 이런 단식은 안해도 되겠죠. 아부지 감사드립니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이 죄인을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아멘.” 

 

아버지란 표현보다 아부지란 표현이 더 정답게 느껴집니다. 온갖 어려움중에도 한결같이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어느 자매의 메시지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잠깐의 나태함도 허용안되는 부단한 노력과 공부! 저희들을 한결같이 이끌어 주시고 일깨워주시는 신부님, 사랑합니다!” 

 

저에겐 제 강론을 나누는 모든 분들이 더불어 주님을 찾는 구도자이자 도반들입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또 저에게 날마다 감동을 선사하는 살아 있는 성인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늘 봐도 미소띤 한결같은 표정에 날마다 끊임없이 많은 분들을 만나며 주시는 메시지도 살아 있는 말씀들입니다. 우리나이 89세의 고령에도 어쩌면 한결같은 열정의 삶인지 참 경이(驚異)롭고 저에게는 살아있는 멘토가 됩니다. 어제는 교황청을 찾은 신학교 사제들을 향한 말씀중 일부가 저에겐 참신했습니다. 

 

“교회는 진보중에 있는 하나의 활동이다. 성령의 새로움에 늘 열려있는, 자신과 자기자신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극복해내며, 끊임없는 움직임중에 머무르는 교회는 무엇보다 열려있는 구성체이다.” 

 

이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닮은 우리 깨어 있는 신자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사야서 제1독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 있는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복음의 세리 레위는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의 구도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이런 레위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뿐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하나를 위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가 아닌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레위와 함께,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항구하고 한결같이 더불어 따름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롭게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공동체, 식사공동체에 합류시키셨듯이 우리를 교회공동체에 합류시키셨습니다.   

 

외로운 혼자가 아니라 도반들과의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우리가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레위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역시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우연이 아닌 주님의 섭리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여기까지 주님 친히 인도해준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 ‘치유받은 병자’, ‘회개한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죄라기 보다는 병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모두가 죄인이요 병자들 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참된 겸손에로 이끌고 구원의 주님을 더욱 갈망하게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자 치유요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과 회개의 여정, 치유의 여정은 동시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도 깊이 들여다보면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아,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실 유일한 분은 천하의 명의(名醫)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평생교육, 평생힐링에, 불치병 같은 무지의 병의 치유에 주님의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얼마나 신바람 나는지요! 사랑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놀랍습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까워 전반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의 참된 단식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새삼 참된 회개가 없어 병들도 많은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치유와 겸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따름의 여정과 함께 무지의 어둠도 서서히 걷혀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샘터이자 쉼터이자 배움터인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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