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오 25, 31 - 46
이전글 이전 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1|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8 조회수172 추천수3 반대(0) 신고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25,40)

주님은 세상의 굶주리고, 목마르며, 외롭고, 헐벗으며, 아파하고 갇힌 이들을 내 형제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께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한 작은 이들에게 대한 나의 행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횟수에 상관없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이 바로 마지막 심판 날의 심판 기준이 된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냐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답게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것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나의 처신과 행동이 바로 구원과 축복을 아니면 멸망과 저주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 여부와 그 기간, 기도와 신심 행위의 횟수에 좌우되지 않으며 사랑의 실천 여부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사순시기에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 역시도 당신의 형제이며, 형제인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  (레19,18)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거듭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행동이며, 작은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에, 어떤 면에서 저와 같이 머리로 살아가는 성직자들보다 어쩜 글도 모르시는 시골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 실행하고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왜 임금은 목자 역할을 하며, 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구분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한 가족처럼 사랑하며 때론 미워하면서 만나고 살았는데, 그런데 죽어서 하느님 대전 앞에 나가서 둘로 갈라지게 되는가?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였기에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 「단순한 기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곧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복음 작가는 최후 심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자들의 매일 하는 일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일상적으로 목자는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데, 염소는 추위를 타서 안에다 넣고 지붕을 마련해 주는 반면에 양은 한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참조하여 최후 심판 때에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25,3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낮에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 먹다가 밤이 되면 각각의 우리에 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실존적으로나 영성적으로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과 보잘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동기를 추궁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양과 염소로 갈리는 기준은 이를 깨닫고 실천했든지 이를 모르고 실천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사랑과 자비를 행함과 행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즉,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의인들 가운데 어떤 누구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 주님이었다면 모른 척하지 않고 기꺼이 베풀었을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양쪽의 말을 다 일축하고 각각의 경우를 나에게 베푼 것과 나에게 베풀지 않은 것으로 구별하십니다. 결국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며(25,40),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25,46)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오른쪽(=영원한 생명)과 왼쪽(=영원한 벌)으로 갈라선 사람들은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아무도 몰랐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기준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 심판에 실제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을 받는 곳으로 구분 짓는 기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착각하지 않고 마음에 새겨 살아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갈라지는 구분은 죽어 하느님 대전에 나가는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지구 행성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진실이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피에르 신부가 언급한 것처럼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일 내 삶의 보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 이를 깊이 깨닫고 참된 선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을 갈망하고 고대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살아 있다는 이 기적과도 같은 실존을 감사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주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10,10)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길은 바로 내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음을 일찍 깨닫게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정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는 나일 수 없기에, 작은 사랑의 몸짓일지라도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