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
---|---|---|---|---|
이전글 | 2월 22일 / 카톡 신부 |1| | |||
다음글 | 반석과 교회 |1| | |||
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2-22 | 조회수367 | 추천수5 | 반대(0) |
학교에 다닐 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군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부드럽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외강내유(外剛內柔)’라는 말은 소인배들의 행동이라고 배웠습니다. 소인배는 자신에게는 부드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외강내강(外剛內剛)’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인에게 엄격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입니다.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는 필요한 덕목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소방대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 같습니다. ‘외유내유(外柔內柔)’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술에 술 타고, 물에 물 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상시에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본인은 물론, 조직에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생각해 봅니다.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은 ‘외강내강’의 사목자였습니다. 고향이 황해도셨고, 실향민이었습니다.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탈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사시면서 외강내강의 삶을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 씨에, 옥니에, 곱슬머리 면 고집이 엄청 세다.’ 아버지 신부님은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최 씨였고, 옥니였고,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런 성품이셨기에 교구의 재정 담당을 하였고, 본당 신축을 3번이나 하였습니다. 은퇴하여서도 식복사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하였습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는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아버지 신부님처럼 ‘외강내강’의 사목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잘 했네, 잘 될 거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편의 이런 말도 좋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기어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도 좋아했습니다. 결국 길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듯한 햇빛이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인가를 잘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저 자신을 맡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읽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습관을 결정할 수는 있다. 그 습관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외유내유하는 제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욱’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자꾸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외유내강’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온유하셔서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했을 때라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스스로의 삶에는 엄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성격이신지요? 어떤 성격이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