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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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2-24 | 조회수9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마태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고대 근동지방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은 거의 약자의 입장이었습니다. 다윗왕 통치시절, 그리고 솔로몬 왕이 통치하던 잠시 동안만 영화를 누렸을 뿐,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페르시아 같은 대제국이 근동지방의 패권을 차지했을 땐, 정든 고향을 떠나 먼 타국 땅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지요. 그런 상황이다보니 그들의 마음은 늘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을, ‘피해를 입으면 반드시 똑같이 보복한다”는 동태 복수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에 따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데에도 조건과 차등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고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이웃’은 사랑하는게 당연했습니다. 반면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며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원수’는 미워하고 증오하는게 당연했습니다. 심지어 율법 규정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을 정도였지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는 이웃과 원수를 명확히 구분하여 처우를 달리하는걸 당연히 여겼던 그들의 인습과 관행을 완전히 파괴하는 말씀입니다. 이웃이나 원수를 차별하지 말고 똑같이 사랑하라니, 심지어 그 미운 원수놈들을 위해 기도까지 해주라니… 늘 원수 같은 놈들에게 당하고만 살아서 마음에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건, 그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그들을 무조건 참아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그래서 그분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고 싶다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하느님처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한다는건 ‘어떻게 해야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달지 않는 것입니다. ‘이만큼만 사랑하겠다’는 한계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본적으로 그를 향한 호의를 마음 속에 지닌 채, 그가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눈에 거슬리면 거슬리는대로, 나를 아프게 건드리면 건드리는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더 먼저 사랑하는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사랑을 더 많이 간직한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면 되고, 마음 속에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이 사랑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이나 시기,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에 물들지 않는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랑의 방식이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보호, 그분의 이끄심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나에게 사과하지도 않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내가 바보같고 억울하게 느껴지겠지만, 그 기도의 유익과 효과는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워야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져야 더 높은 차원에 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저 원수 때문에 힘들고 괴롭지만, 지나고 나면 원수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원수가 아닙니다. 그가 아직 원수로 보이는 사람은 증오와 집착이라는 터널을 지나지 못한 것이고, 팍팍한 세상살이에 속박되어 하늘로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은 굳이 과거의 증오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굳이 땅의 원한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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