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라톤을 기억하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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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4-02-25 | 조회수10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마라톤을 기억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끝에 그리스의 한 병사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페르시아 군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42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서 그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는데서 기원한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도 마라톤은 맨 나중에 하는 경기입니다.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처음에는 몰랐으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고 하늘로 가신 후 2천 년이 되어 교회에서는 대희년을 선포하고 바오로의 해를 지낸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를 기억하며 사도 바오로께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을 따와 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한 사도 바오로는 그의 순교 이후 2천 년이 지나서 승리의 화관을 썼습니다. 저는 마라톤을 하는 경기를 볼 때마다 사도 바오로의 열정을 생각하며 마라톤 같은 인생에서 마치 단거리를 달리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달리신 그분을 기억하지 않을래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복음을 실천합시다."라든가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승리하시기를 빕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허공을 치는 권투를 하지 않는다던가 달릴길을 다 달렸다는 말을 한다던가 갑옷을 입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든다던가 영가를 불러드리라고 하는 것을 보아 개신교는 베드로보다는 바오로 사도의 것을 더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스포츠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좋아합니다. 이것도 차츰 벽이 무너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그렇습니다. 인생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마라톤입니다.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경기 룰을 지키며 죽을때까지 다 달렸다는 말씀을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서의 복음 전파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며 이 상을 받고자 달리겠노라는 다짐도 해봅니다. 여기에서도 한마디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라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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