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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23,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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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26 조회수77 추천수2 반대(0) 신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23,2~3.5)


君師父一體(=임금, 스승, 아버지의 은혜는 다 같다.)란 말을 듣고 성장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이런 사고는 한낱 낡은 구시대의 가치로만 치부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승, 아버지, 선생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예수님 당대의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어른답지 못한 행실을 빗대어 무엇이 진정한 어른스런 존재이며 어른다운 삶인가를 질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23,2~3) 살아온 세월만큼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은 늘어나지만 실행하는 것은 줄어드나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비례하지 않은 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합니다. 제대로 나이 든다는 것은 살아 온 삶을 통해 보고, 들으면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남의 무거운 삶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이지 남에게 무거운 짐을 더 올려놓은 존재여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른이란 존재와 어른으로 존경받는 삶이란 살아갈 길이 아직도 까마득한 먼 인생길을 걸어가는 손아랫사람들을 배려하고 지지해 주며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며 존중해 줄 때, 그런 그 어른의 모습을 보고 어른으로 존경하고 알아 모실 것입니다. 요즘엔 어른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참으로 큰 어르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거슬려서 악한 행실을 범하고 당신 앞에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1,18) 라고 호소합니다. 당신께 되돌아온다면 더 이상 이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베푸실 것임을 약속하시는 오직 한 분 우리의 크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보다 더 낮아지고 섬긴 분이 어디 있었습니까?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아버지를 향해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시50,23)

사제가 되기 전 그리고 서품 초기에 만난 수녀님들은 왜 교구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회 사제가 되었나요,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교구사제와 수도 사제 간의 우열을 가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예전엔 종종 교구 신부님들은 농담 속에 자신을 재속 신부라는 표현을 쓰시면서 수도사제가 성성(=거룩함)에 있어서는 우위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사제와 수도회 사제의 성성의 차이라기보다는 살고 있는 현실이나 상황에서 오는 삶의 태도나 적응 방식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자로 살아오다 보니 제 몸에 각인된 것은 높은 자리에 서고, 앉는 것이 별로 마음에 썩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저자신 내향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가 사제로서 혹은 수도자로서 해야 할 일들 곧 미사나 강론할 때는 두려움이나 긴장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서고 앉아서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이나 자리에 나설 때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교회 행사에 참석했을 때, 귀빈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소개할 때나 축일이나 다른 특별한 경우에 꽃다발을 받고, 옷에 꽃을 부착하는 것 등을 포함해서 윗자리에 앉는 게 사실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저희 수도회는 이런 면에서 참 편하고 단순합니다. 식사 자리는 장상이라고 해서 굳이 따로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입회 순서도 아니고 각자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됩니다. 그런데 수녀원이나 다른 수도원에 가면 손님 신부라 해서 굳이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할 때, 사실 거절하고 다른 곳에 고집스럽게 앉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제가 겸손해서라기보다는, 타고난 성향과 함께 제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앞에 나서거나 높은 자리에, 그것도 선배이며 윗사람이라고 나설 여건이나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적응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구사제보다 성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단지 수도원에 살다 보니 이런 의식이나 행동 양식이 몸에 배었기에 그랬을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수도사제가 된 것이 참 좋고, 저를 자유롭게 편안하게 양성해 주었기에 제 공동체에 감사합니다. 쓰임이 다르고,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르다고 보면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저를 잘 아셔서 있어야 할 자리에 맞게 쓰셨다고 봅니다. 저는 성깔이 있는 남자이지만, 제가 맡았던 자리에서 제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 자리에서 교만이나 거들먹거리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물러날 줄을 알고 내려갈 줄을 배운 것은 저의 노력이라기보다 수도 생활의 체질화와 생활화 덕분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은 특히 교회 안에 봉사자로 불림받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깊이 명심해서 들어야 할 뼈아픈 소리라고 봅니다. 어떤 존재가 책임 있는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 자리에 적합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이는 하느님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분과 관계되는 사람들의 기대이자 요구라고 느껴집니다. 어떤 존재가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에 걸맞은 삶의 내용 곧 말과 행동이 수반해야 함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지적하십니다. 사실 저 또한 사제나 수도자를 볼 때, 더욱 젊은 측에 드는 사제나 수도자가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 비위가 뒤틀리고 심기가 불편한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서품이나 서원은 그 존재를 드높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앞에 낮아지게 만들고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해 본이 되고 모범이 되게 합니다. 사제 수품 미사의 경문을 보면 주례자인 주교는 새 사제에게 복음서를 수여하면서, “그대는 이제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으십시오.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의 사제나 수도자들이 이 전례 예식어가 말한 바대로 살아간다면 굳이 오늘 복음이 불편하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점은 어떤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게 마련인데, 문제는 바로 모세의 자리 곧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자신이 이 자리에 앉은 이유는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해서 불림받고 선택된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자신의 존재가 숨을 것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선다면 굳이 높이거나 낮아지려고 하지 않아도, 어떤 자리에 착석하던지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자신답게 처신하리라 봅니다. 그런 모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낮은 곳(=장소가 아니라 직책에 있어서)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몸으로 느끼고 존경을 표현하리라 봅니다. 진정 오늘 교회에서 사람들이 보고 싶은 새로운 지도자들의 모습이란 그들이 섬기는 존재이고 섬기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책은 높은 자리이지만 존재하는 모습이 낮은 곳에 있는 듯싶으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해 기울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혹여 당신의 말씀을 뒷전으로 팽개치고 살았다면 저의 행실을 제 눈앞에 펼쳐 보이시고 나무라시고 꾸짖어 주십시오. 저를 흔들어 깨워주시어 당신께서 인도하신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오늘은 저희 수도회 <고통의 성모 성 가브리엘 포센티 축일>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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