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예수님 따르려는 우리는 /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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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2-28 | 조회수10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예수님 따르려는 우리는 / 사순 제2주간 수요일(마태 20,17-28)
요즘도 여전히 학생을 둔 부모님의 큰 관심거리도 자녀 공부다. 남보다 공부 잘해 취직 잘되는 학교에 가 좋은 직장 얻고, 거기에서 돈 많이 벌어 큰 집서 살고, 좋은 차 타는 게 공부의 목적인 듯하다. 인격적인 것보다, 돈 벌어 출세하려 공부하는 것 같다. 이러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서, 간혹 거짓과 부정이 끊이지 않는다. 자녀가 출세하고 돈 잘 번다고 잘 키웠다고 볼 수는 없다. 오늘날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남을 짓밟고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남에게 봉사할 줄 아는 이, 이웃과 나누며 함께 살 줄 아는 이로 키워야 자녀를 잘 키운 것일 게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 가치관이다. 그래서 그분 말씀은 늘 새 신선함으로 다가 온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 나라에서 저의 이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어느 부모나 자녀 잘되기를 바랄 게다. 이렇게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자식에게 높은 자리 좀 주십사고 청한다. 다른 제자들은 이에 불쾌감을 드러낸다. 그들도 여전히 높은 자리 욕심내고 있었던 걸까?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위한 어머니 마음은 어쩌면 다 똑같은가 보다. 아무튼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치맛바람을 일으킨다. 두 아들을 바쳤으니, 한자리 좀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자리다툼이나 하였기에.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이유를 밝히셨다. 곧, 많은 이를 위해 목숨 바치러 오셨다는 거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가 많다. 오해받거나 무시를 당할 때도 잦다. 시련마저 끊임없다.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 십자가만 보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세상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겠다. 희생과 봉사가 다른 이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된다면, 기꺼이 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들 ‘사람은 제 먹을 복 타고난다.’라나. 이는 하느님께서 자식을 이 땅에 보내실 때는 뜻이 있고 보살핌이 있었다는 거다. 사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다. 그래서 그분께 자식 맡기는 게 현명하다. 자식을 주님께 맡길수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더 커지지 않을까? 예수님 말씀은 남들처럼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면 되지, 남들 마냥 옆자리라는 자리마저도 욕심내면 안 된단다. 그래서 예수님 따르려면 세상의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우리도 저 예수님 제자처럼 잘못된 환상 갖지는 않는지? 그들처럼 모르고 청하지는 않는지?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쳐는 것이 내 잔임을 알고는 있는지?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어찌 감히 청할 수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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