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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루카 16, 19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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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28 조회수85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16,31)


오늘 복음의 부자는 죄인이 아니지만 예레미야와 시편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사람의 속을 떠 보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예17,10) 는 말씀의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거지 라자로와 달리 이름조차 없는 점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이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라 자랑하고 살았으며, 그런 연유에서 풍요의 감옥에 갇혀 이웃의 어려움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였으며, 이웃에게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삶을 살았죠. 그는 한마디로 주님에게서 마음이 이미 떠나 있었으며 그러기에 그의 미래는 마치 “광야의 메마른 곳과 같은, 인적 없는 소금 땅과 같은 곳”(예17,6)인 저승의 고초를 겪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복음의 부자에게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와 친지들을 통해 후회하지 않는 참된 삶과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같은 의식과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뢰를 하느님께 두고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시1,3), 살아가면서 때론 어려움도 겪게 되겠지만 두려움 없이 잎이 푸르른 삶을 줄곧 삶의 풍성한 열매(예17,8)를 맺게 될 것입니다. 신뢰를 주님께 두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 (시1,3) 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가 이 땅에서 살면서 드러난 삶의 극명한 대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내 저승 곧 죽음 이후의 삶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뒤바뀐 삶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 줍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어설픈 상선벌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드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통을 겪은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죽을 죄는 아니잖아요. 부자라는 이유로 무조건적 지탄받고 비난받고 단죄받는다면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참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갔는지 그렇지 않은지 저의 관심사는 아니며 그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겠지요. 다만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대로, “너희는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12,15)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기에” (루12,21)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더욱 마태오 복음의 최후심판에서도 이런 점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25,45) 곧 부자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고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였으며, 그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기에 하느님 없이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것처럼 살았으며, 그런 사고 의식에서 자신이 가진 바를 세상의 이웃이며 형제인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고 베풀기보다 가진 것에 집착하고 탐욕을 부리며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관심하여 자신 안에 갇혀 살았기 때문이며 이것을 우리는 소위 세상의 죄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가난한 사람으로 살기보다 부자로 사시길 바랍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신만의 쾌락과 안일을 위해서 간직하고 쓰는 것보다, 가진 재물을 이용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데 힘쓰십시오.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오히려 돈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가진 재물을 이용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으며 오히려 더 겸손하게 소박하게 마치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단순하게 소박하게 살아가는 부자가 되십시오. 그 가난한 거지의 이름은 나오는데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은 까닭을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거지의 이름을 성서는 ‘라자로’ 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의 실제 이름이 라자로 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라자로의 의미가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주님께서는 늘 자상한 아버지로서 돌보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는 그 부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며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런 부자를 돌보지 않으시고 호명할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더욱 이름이 없는 부자는 단지 성서에 나오는 한 사람이 아닌 부자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에 이름을 부를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그리고 라자로는 부자를 필요로 했고 서로 도울 수 있었는데, 관계가 단절되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는 결국 축복을 받을 기회를 부자는 잃어버렸고 천국으로 갈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면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만일 여러분은 부자의 풍요로운 삶과 라자로의 궁핍한 삶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어떤 존재로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행복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회 회원 7,000여명과 가진 미사에서 “돈을 숭배하면 돈이 사람의 선택을 결정하게 되고 결국은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라며 강한 어조로 돈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 성경보다 더 강경한 표현으로 돈을 비판한 것은 지나치게 돈을 우선시하는 세상적인 사고와 의식의 행태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아시아 교회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위험 수위가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았던 베트남도 머지않아 굳건한 신앙을 잃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지 당신 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문제임을 꿰뚫어 보시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6,24)라고 하신 말씀임을 더 뼈저리게 동의하고 동감합니다.

모든 시대가 경험해 왔듯이, 오늘 복음에서도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부자와 빈자 사이의 관계 단절은 너무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사목 방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미 오늘 복음의 핵심과도 동일한 논조에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란 곧 오늘 복음의 라자로처럼 사람을 죽일 뿐이다, 는 것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53항)
   “주님, 당신은 저희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떠보시는 분이시며 저희 삶의 결과에 따라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알기에 모든 이의 모든 것인 당신께 신뢰하며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만을 믿고 따르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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