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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도 행복도 선택이다!”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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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29 조회수218 추천수6 반대(0) 신고

 

-회개의 일상화-

 

 

삶은 선택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회개도 사랑도 선택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연옥이, 지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택에 따라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행복을 선택해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의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타고난, 바꿀수 없는 부정적 요소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을, 희망을, 사랑을,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다산의 어록중 다음 내용도 우리에게 선택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걸음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요할 때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

 

얼마전에는 군에서 전역후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해 힘차게, 희망차게,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저를 삶의 멘토라 부르며 따르는 60대 중반의 ‘이용민 요아킴’형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2005년 봄에 만났으니 무려 20년째 교류를 계속중인 분입니다. 이분이 선물한 “신중년의 비상(飛上)”이라는 책 제목도 멋졌고, 날마다 비상의 삶을 선택하여 사는 모습도, 또 서문의 감사로 끝나는 끝말도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응원해주고 지지해 준 아내 임영자 여사, 나의 인생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잘 정리해 준 아들 형록이와 딸 민지에게 감사하고 이 책을 바친다.”

 

작년 8월15일부터 시작한 선택-훈련-습관화의 도식에 따라 기상하자마자 시작한 만세육창 기도-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주님도 천국도 행복도 선택임을 확인하는 다음 제 ‘예닮기도’ 일부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희망,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의도적 선택이,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말그대로 깨어 회개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의 참나를 사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매일미사중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 후반부 말씀 역시 우리를 뒤돌아 보게하는, 또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을 보면 구제불능의 사람이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 현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 사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들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판불변의 법칙’이니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말도 회자되나 봅니다. 이런 부정적 숙명론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이래서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참 절박합니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창세기 노아 홍수후에도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8,21)

 

바로 이런 부정적 인간상의 전형이 오늘 복음의 이름없는 무명의 부자입니다. 이름이 없는 부자, 존재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부자처럼 부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무지의 헛된 유령같은 삶을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고 못하고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참 충격적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는 오직 자기만 알고 라자로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라자로야 말로 부자에겐 구원의 문이요, 회개의 표지로 부자를 심판하지만 무지한 부자는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감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리듯 라자로는 이름도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흡사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가 부자와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생각없이, 영혼없이 몸의 욕망따라 살아 온, 주님 탓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업보의 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처지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가 가로놓여 있는 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고정된 단절의 구렁이입니다. 내 중심의 삶들을 살기에 각자는 고립된 섬처럼 되고, 참으로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들을 살 때 하나로 연결됨으로 서로간 단절의 구렁도 사랑으로 메꿔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의 참행복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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