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뜨끔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새로운 시각으로 본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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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3-01 | 조회수13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도 어느 복음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이 비유는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고 또 비유로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상상의 상상을 거듭해서 풍부한 묵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준적인 성경 해석을 언급하는 묵상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에서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개신교 방송이라든지 어떤 교회에서 목회자 자신을 언급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주의 종’ 이라는 표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 표현에 나오는 종과 거의 동일한 개념입니다. 가톨릭으로 눈을 돌려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 사목일선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 기타 등등 이와 같은 직위에 있는 분들을 상징합니다. 2000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종교지도자들이 될 것입니다. 더 이전으로 되돌아가면 예언자들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대변해 주고 또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당에 가고 내일도 성당에 갑니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왜 믿는가에 대한 정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 중 하나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유한한 생명이 주어지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다음 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에 간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말에는 가다와 오다는 역의 개념입니다만 영어에서도 동일하지만 어떤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에는 오다로 많이 알지만 사실 가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대성 이론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아주 쉬운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레일 위에서 열차가 달리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 기차가 간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기차는 고정돼 있고 레일이 달린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론 기차는 고정돼 있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착시효과와 같지만 물리적인 개념으로 보면 이것도 마치 기차가 달리는 듯한 효과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같은 개념을 이해한다면 아주 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표현을 유심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을 보면 하느님 나라는 간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표현해도 같은 개념입니다. 세상에서도 나라 국가가 성립하려면 백성들이 있어야 하고 그 백성이 민족을 이룹니다. 어떤 백성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일까요? 소출을 내는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출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단순히 어떤 결과물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결과물은 열심히 한 대가로 나오는 가시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소출은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실했을 때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이제 이런 개념을 이해한 상태에서 오늘 전체 복음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생각해본다면 아주 명확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언자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오늘날의 예언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도 백성을 통치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언자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2000년 전에 다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들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한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도 그랬지만 그와 함께 같이 목소리를 낸 사람들에는 백성들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단순히 종교지도자들의 책무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할 게 아닙니다. 우리 일반신자들도 제가 일전에 언급한 보편 사제직처럼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작은 예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데 필요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돌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집을 짓는 데 돌이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쓸모없다고 내버린 돌이었는데 그게 집을 지탱하는 머릿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쓸모없다고 어느 하나도 배제시켜서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실상 나중에 하늘나라가 건설된 후에는 그 보잘것없는 돌이 하느님 나라를 멋지게 장식할 줄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이 그날에는 수치를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수치는 왜 생기겠습니까? 소출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가 맡은 책무를 성실하게 잘 수행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우리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편의상 성직자와 수도자를 세우신 것이지 우리 모두도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 책임은 다 똑같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할 소임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냥 복음 말씀으로 이해를 하면 되지 않고 정말 철저히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느님을 만나는 날 가슴을 치는 일이 없으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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