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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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3-02 | 조회수11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이 알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겁니다. 뻔한 내용을 가지고 묵상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하면 회개 회개 하는데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요? 정작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몇 년 동안 신자들과 이야기를 사순시기 때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냥 막연히 사순하면 회개와 보속을 하는 시간이라고 하니 그냥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회개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상의 평범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부터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물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참회를 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대부분 자기 자신은 이런 정도로 회개할 내용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런 정도로 회개를 할 만큼 큰 죄는 없다고 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몰라서 그렇지 사실 꼼꼼히 살피면 회개할 게 한두 개가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은 무얼 회개해야 하는지 그걸 몰라서도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한 행위가 고해를 할 상황의 죄인지 아닌지도 모르기 때문에 실제는 성사를 봐야 하는데 그냥 이건 고해를 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나중에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묻혀서 넘어가려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국어실력이 뛰어나면 그냥 단박에 답이 나올 겁니다. 회개의 시작은 사소한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도 회개할 줄 모르면 큰 죄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오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은 모르고 지날 수 있지만 대죄는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에 더 잘 회개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도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될 것 같지만 이것도 평상시에 작은 것도 잘 성찰하는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남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잘 살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친절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결정적인 차이가 나는지 아시는지요? 그건 어떤 생각을 해서 친절을 베푼 게 아니고 몸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건 몸이 그만큼 친절에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고 나서 나오는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앙 안에서 회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라고 복음에 나옵니다. 이와 같은 복음을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인정을 하면서도 그건 사람이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할 수 있다고 자기 선에서 말씀을 절하평가합니다. 마치 자기가 하느님인 양 그렇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나약한 인간이라 넘어지긴 해도 그 말씀에 비추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을 하다가도 넘어졌을 때 하느님께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절대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회개는 백번을 해도 회개가 아닙니다. 가슴으로 통회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 모두는 작은아들을 탕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작은 아들의 모습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요? 만약 그런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인입니다. 작은아들의 이야기를 재산과 또 재산을 탕진한 사례에 국한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비건한 예시에 불과합니다. 광의로 해석을 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는 있을 수 없는 행위이고 패륜행위입니다. 제가 글로써는 표현을 할 수 없네요. 워낙 패륜행위라서요. 제가 표현을 하면 역겨워서 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하느님께 예수님께 이와 같은 패륜 행위를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자기가 한 행위가 패륜 행위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본 원인은 평소에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는 잣대나 기준이 자신한테는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날카로운 칼로서 재단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그 칼날을 자신을 향해서 재단을 한다면 어떤 사람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우리 모두도 작은아들처럼 탕자라는 사실을 알 때만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을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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