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왜 그땐 그게 은총이었는지 몰랐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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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03-02 | 조회수14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그제 목요일 저녁에 저녁미사를 하러 가다가 아마 성당에 가시려고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 노자매님을 보고 제가 차를 세워 성당 가시면 타시라고 하며 성당까지 모셔드렸습니다. 10개월 전에 우연히 이 자매님의 가정사의 한 부분을 알게 됐습니다. 아들이 사제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여자 관련 문제가 생겨서 사제직이 박탈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2011년 11월에 영세를 받았는데 그 이후로 그땐 이분이 나름 열심히 성당에 나오셔서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언젠가부터는 얼굴이 항상 어두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게 그 아픈 마음을 쉽게 감출 수 없나 봅니다. 타교구에도 교구민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사례가 있는데 그 교구 자매님이 저한테 알려줘서 알게 됐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모친 얼굴을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연을 보는데 제 말투가 경상도 말투라 물어보셔서 그때 그분이 그걸 계기로 해서 신부님의 모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얼굴 표정이 사제인 아들을 둔 자랑스런 모습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재작년에 원주교구 희망의 순례를 하면서 우연히 면직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성지 근처의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제 옆 테이블에 앉았었는데 제가 최양업 신부님 상본과 여러 기도서를 보고 있었고 또 식사가 나왔을 때 성호경을 그을 때 갑자기 옆에 있던 분이 흐느껴 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처음엔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중에 그분이 나가시면서 메모 종이 하나를 남겨주시고 떠나셨습니다. 메모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만 보니 가톨릭 신자 같은데 지금 순례하시는 모양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끝까지 잘 지키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지막 문구는 이랬습니다. 한 때는 사제였다고........ 그 메모를 보고 밥도 다 먹지 못한 채 배낭과 짐을 정리해서 그분을 찾아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메모를 본 순간 가슴이 찡했습니다. 한 때는 사제였다고 하는 그 말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이기 때문에 가슴 한 쪽에 뭔가 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가 먼저 시간이 되시면 차 한 잔 할 수 있겠는지 하며 대화를 요청했는데 그분이 기꺼이 해 주셨습니다. 메모를 보니 과거에 신부님이셨는 것 같은데 왜 아까 그런 메모를 저한테 주셨습니까? 보통 이런 상황이면 그냥 넘어가는 게 일반적일 텐데요.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제직이 박탈된 후로는 성당에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밖에서 성호경을 긋는 사람들을 본 적은 여러 있었지만 그땐 별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오늘 형제님이 식사를 하기 위해 성호경을 긋는 모습을 보니 또 성지순례를 하는 모양이라 남다르게 보였고 과거 부제품을 앞두고 성지순례를 했는데 그때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한 생각에 울컥해서 아까 눈물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연한 일이지만 면직된 신부님을 지금까지 세 번 만났고 또 수녀원에서 나온 수녀님을 두 번 만났습니다. 수녀님은 제가 결혼을 하려고 누가 소개를 시켜주셔서 만났던 것입니다. 제가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었다가 입지 못하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나 우리 평신도랑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사제복과 수도복이 그분들의 삶을 지켜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오늘 오전에 복음 묵상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아는 수녀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늦어서 오늘 아침에 문자를 하겠다고 해서 주셨습니다. 지금은 마산성지여고에 계시는데 저희 본당을 떠나신 지 오래됐습니다만 계속 그곳에 계십니다. 수녀님 얼굴이 참 순박합니다. 어디 두메 산골에 사는 순박한 여자처럼 해맑습니다. 저는 그래서 수녀님을 수녀님으로서 참 좋아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제보다 한참 어릴 것입니다. 지금도 생생한 장면이 있습니다. 본당에서 제가 복사를 서고 나오는데 수녀님이 운동 선수들이 하는 모양처럼 파이팅 하는 모습을 하시면서 손짓으로 응원하시는 모습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수녀님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옆 본당 새벽미사에서 수녀님을 뵈었습니다. 수녀님이 주신 문자를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지만 수녀님의 문자 속에는 제가 웃을 기분이 아닌데 수녀님의 문자 내용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웃음이 나왔습니다. 역시 제가 본 수녀님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이런 수녀님이 좋습니다. 저는 지금 약 20년 넘게 티브이를 보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때 그 드라마에 나오는 김원희 탤런트 역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수룩한 듯하면서 순박한 모습이 저는 좋았습니다. 학교에 계신 수녀님을 보면 저는 김원희 같은 모습이 생각나 어쩌다가 혼자 웃곤 합니다. 갑자기 면직된 신부님 이야기하다가 삼천포로 흐르는 것인지 의아하실 것입니다. 왜 갑자기 김원희 이야기가 나왔는지 다음 이야기를 듣게 되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은총이 주어진다고 했을 때 그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를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로 살 때 그리고 수녀로 살 때 말입니다. 면직되고 또 수녀원에서 나와서 그 은총이 얼마나 컸는지 그땐 왜 몰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수도자도 있을 겁니다. 지금 그 자리가 얼마나 큰 은총의 자리인지도 모르고 물론 수도자로 살아가지만 그 은총을 박차고 살아가는 수도자 말입니다. 성직자의 길과 수도자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존경 받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쉽다면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그 길을 가기로 한 이상 또 하느님께 서원한 이상은 죽는 날까지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을 가되 그냥 세월만 흘러서 가는 그런 세월은 보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수도자로 살기로 서원한 이상 그 수도 서원 맹세를 매일 매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 맹세를 되새기는 수도자는 이 땅에서 진정한 수도자로 살 수 있을 거라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수도자는 어떨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같은 모습을 닮은 수도자 성직자는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성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수도자 성직자만큼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제가 며칠 전 묵상글에 수도복이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건 아주 오래 전에 김웅렬 신부님이 강론에서 하신 표현을 제가 인용했습니다. 결론입니다. 지금 수도복을 입고 계신 분들이 지금 그 자리가 얼마나 큰 축복과 은총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왜 면직이 되고 또 수녀원을 나왔을 때 깨닫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해는 한편으로는 되지만 이건 이해를 하면 되지 않아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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