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3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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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3-03 | 조회수13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 시대, 율법에 따르면 성전에 참배하는 19세 이상의 유대인들은 누구나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다양한 국가들의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는데, 유독 성전세만은 유대 화폐인 갈릴리 세겔이나 성전 세겔로 내도록 규정되어 있었기에, 각지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은 환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전상들이 바로 성전 마당에서 수수료를 받고 환전을 해주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과정에서 대단한 폭리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또한 순례자들은 감사의 제물로서 흠 없는 동물을 바쳐야 했는데, 성전 뜰 안에서 파는 제물만이 ‘흠 없는 것’이고, 성전 밖에서 사서 가지고 온 소나 양, 비둘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성전 마당에서 파는 제물을 사야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상인들이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정행위는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상인들의 공모에 의해 공공연하게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바로 그 점에 분노하셨던 겁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저지른 잘못의 핵심은 단지 돈 문제로 ‘비리’를 저질렀다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성전’과 ‘제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복수의 하느님’, ‘심판하시고 단죄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무서운 이미지만 남게 된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지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신경 안쓰시고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의 매’를 드시어 우리를 따끔하게 혼내시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분은 ‘심판’과 ‘복수’보다 몇 백배 더 크고 넓은 ‘용서’, ‘자비’,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통해 하느님의 그런 이미지를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딱딱한 ‘건물’ 속에 계시는 차가운 분이 아니라, 우리의 부드러운 ‘마음’ 속에 계시는 따뜻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권한’이 있는지를 ‘표징’으로 드러내보이라는 요구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4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갖 고생과 노력을 기울이며 쌓아올린 것이라도,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그저 내 욕심과 고집을 겹겹이 쌓아올린 ‘바벨탑’에 불과하다면 과감하게 허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쌓아올리는데에 고생을 얼마나 한지 아느냐고, 지금까지 쌓아온게 아까워서라도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버텨봐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잘못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부수고 허문 다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세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 과정이 바로 ‘내 마음의 성전정화’인 것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잘못된 부분을 즉시 바로잡는 단호한 결단과 실행입니다.
[이솝우화]로 유명한 작가 ‘이솝’이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모시던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얘, 이솝아,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는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욕탕을 드나드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 돌에 대고 욕을 퍼부으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참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이 지켜보는 동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습니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욕을 하는 대신 단숨에 그 돌을 뽑아내어 길 한쪽에 잘 치워두고는 손을 툭툭 털며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솝은 그제야 벌떡 일어서더니 목욕탕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불의나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기는 쉽습니다. 자신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는건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쉬운’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즉시 회개하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부정과 불의의 돌부리를 발견하면 내 손으로 즉시 뽑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사랑의 매’를 드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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