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용서(容恕)는 하느님 사랑이다. (마태18,21-35)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3-04 | 조회수11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년 03월 05일 화요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용서(容恕)를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만 탈렌트는 ‘일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백 년을 일하여야 벌 수 있는 금액이 삼만 육천오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일억 데나리온을 빚졌다면, 이는 평생을 일하여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빚입니다. 결국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한번 상상을 하여 볼까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를 모두 탕감하여 준다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까요? 그러나 이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비와 탕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함을 아시고(제1독서, 아자리야의 기도 참조), 가난을 볼모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자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을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도록 배려하시지만, 인간은 상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파괴합니다. 같은 동료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종의 소식이 전해지자 비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베풀었던 용서와 탕감을 거두어들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하였거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