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돈 받지 말고 돈 내고 가르쳐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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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4-03-13 | 조회수5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다음은 ‘돈 받지 말고 돈 내고 가르쳐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쓰레기 하나를 더할 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발기鉢器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고 발우鉢盂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바로 태어남이니 우리 일반 중생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태어났다.’ 라고 하는 것이며 이때를 기준으로 밥그릇 수를 헤아립니다. 즉 나이 계산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얼마만큼을 먹었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먹거리 문화와는 다릅니다, 현시대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으니 먹거리라는 말이 생겨났지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밥 먹는 것이 바로 즉, 산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부처님 시절에는 굶주리고 아프고 늙고 죽음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타파하고자 더욱 강한 것을 찾았고 드디어는 이러한 더욱 강한 것을 추구함에도 면역력이 생기지 못하여 일반 중생들에게는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였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죽어가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생노병사의 길을 걷다가 죽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밥그릇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부처님은 언제 오셨을까요? 물론 우리들 같은 중생과 같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온 순간부터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하겠지만 실은 모든 것을 깨달은 열반이 태어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를 불기佛紀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어머니로부터 나왔을 때부터 밥그릇 수를 헤아리지만 스님은 세상을 떠나 출가한 것부터 즉 스님이 된 순간부터는 밥그릇 수를 헤아리고 즉 이때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은 순간부터 밥그릇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오직 생노병사의 모든 것을 깨달은 이는 부처님 혼자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태어남이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적 같은 죽음을 보고 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출가라든가 열반에 들었다라는 것은 바뀐 세상을 즉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헤아림이 얼마나 어리석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윤회로서 계속이어져 가지만 이미 깨달은 자는 밥그릇 수에서 멀리 있습니다. 헤아림도 없는 경지입니다. 여하튼 부처님 오신 날은 열반에 든 경지인 생노병사의 것을 보두 깨달은 순간부터 태어났고 그 이전의 세상 것은 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를 굶게 하지는 안했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 시절에는 생노병사롤 특히 굶주림으로 죽어들 가는 데 스님이 된 후로는 이러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먹는 것이 즉 공양이 중요한지는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스님들이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발우鉢盂로서 먹는 것이니 즉 살아가는 것이니 이러한 밥 먹는 예식이 바로 삶과 일치하는 아주 중요한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과 스님이 된 순간과 완전한 깨달음인 밥그릇 수 계산이 서로 다르니 모든 것은 어미에게서 태어나 살다가 깨우침의 길을 걷고 죽는 것이니 어떠한 두려움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들 살다가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려니. 짐승과 사람과는 태어난 같은 시간을 지내고 걷는 것이 바로 다시 태어남이니 이를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공자의 사상이 불교를 지배하였으나 깊이 생각해 본다면 밥그릇 수를 헤아려 즉 생노병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아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서는 사후를 고려하고 태어나다는 윤회인 불교가 더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님은 이 세상을 거론하였지만 근본적인 물음인 사후 세계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니 공자님의 것이 세상의 질서를 잘 유지한다고도 볼수도 있겠지만 근본인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는 부처님의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세상만의 질서는 저 세상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치매란 시간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에라는 곳에 왔을까요? 내가 하느님을 믿는 까닭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는 자로서 육신을 입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성탄절은 기뻐하고 사순, 부활이 육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때 까지 존재한다는 기쁨속에 삽니다. 또 인간을 기뻐하게 하는 것은 어떤 다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난 여전히 성탄절을 더 반깁니다. 이것이 내가 육신을 입은 까닭이기에 그렇습니다. 부활은 육신의 그와 같이 처음부터 있어온 것이지 다른 깨달음 속에 태어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지 부활 때문에 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독특한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난 당신과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난 또 다른 어리석음의 발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수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절이 탄생일이라고 부르고도 싶습니다. 그만큼 나는 영과 육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나는 영과 육이 하나이고 생각하는 내가 아무리 뛰어났다한들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뛰어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들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응애라는 말을 하는 난 당신과 하나라는 인간으로서의 깨달음입니다. 수많은 물음과 답이 있지만 나는 육신을 입은 당신과 같은 것을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인간이라는 육신을 입었습니다. 인간의 위대성을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과 나는 인간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깨달음 이전의 것들로서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부활절, 탄신일 어느 뛰어난 철학자들도 다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뽐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태어나고 죽음이 있다고들 하지만 저 천상에서는 이러한 우리가 또다시 태어난다를 믿는다면 이는 깨달음일 것이고 우리 모습은 다시 발견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나는 저 세상에서도 같은 인간임을 믿으니 화해와 용서의 악수를 청합니다. 지상의 삶을 마치고 부활하신 것은 그분은 하늘에서도 계속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으니 하늘나라에서도 크나큰 대변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물음과 답을 하다보면 부처님 오신날이나 부활절은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깨우치기 전에 있었던 하늘의 신비는 이렇게 존재하며 우리는 같은 물음을 하는 같은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 개입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분은 모태를 열게 하시어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우리를 보면서 나의 본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홀로 라면 어찌 이렇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무리 깨우쳐서 열반에 들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믿는 것은 또한 의문을 낫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남으로서 인간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신앙을 부인 하는 것은 아닐지 라는 물음을 또한 제기합니다. 탄신일, 부활절은 인간이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을 생각해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불기는 열반에 든때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날 성탄절부터 하느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 태어났는가라는 물음에서 공생활이냐 깨달은 날이냐는 말은 인간이 최고로 뛰어난 이성을 두고 그렇게 물음을 하는 것이지 사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지 않습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위대한 것을 이룬 것을 두고 이때를 그자는 다시태어났어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태어남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나온 순간에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어떤 특이한 것을 찾다보니 우리가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보면서 그날을 최고로 여긴다고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태어남은 모두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지 어떤 것을 발명하거나 위대한 가르침을 주거나 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그날부터 태어났다고 하는지 하는 물음을 해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은 것을 두고 그때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것을 무시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개구리가 올챙이더러 매미가 매미 굼뱅이더러 너와 나는 같지 않아라던가 내가 먼저 태어났어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머니라는 품속을 그리워합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고향일 것입니다. 죽음은 또한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하는 걸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탄생일보다는 매일매일 살아있는 존재로서 육신을 입은 같은 인간입니다. 어느 뛰어남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나 또한 우리들은 모두 어머니 속에서 나와 육신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느님이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제 이 세상과 하늘이라는 것을 모두 한 몸으로 이어져 내셨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품속에서 말입니다. 깨달음, 부활이전부터 그분은 계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은 인간이기에 그것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존재하게 하신 분은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이십니다. 그분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을 알겠습니까? 선존재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과 같으신 예수님과 이를 알게 하신 성령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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