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이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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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3-16 | 조회수8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이 / 사순 제4주간 토요일(요한 7,40-53)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그가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 하지 않았는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성경과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사이들은 그들 지식으로 본 논리이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었기에 그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그래서 남 것은 듣지도 않거니와 자기 방식 뒤집는 것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미 가진 지식과 지위를 못 버리면,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으리라. “메시아가 다윗이 태어난 곳이 아닌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 없지 않은가?” 말씀과 행적으로는 메시아인 것 같은데, 제네 지식으로는 저자의 출신지로 봐 메시아일 수 없다는 거다. 사실 그분께서는 베들레헴 출신이지만, 그들은 몰랐다. 얄팍한 지식이 오히려 걸림돌이라, 예수님의 실체를 몰랐던 거다. 사실 ‘메시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선택한다. 그들에게 ‘기름 부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했다. 이후 그들에게는 ‘주님의 영’이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임금이었다. 이 혹독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구원자였다. 이렇듯 그들은 메시아는 남쪽 ‘유다’에서만 나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래아’ 출신이라, 아니라는 거다. 참으로 어리석은 군중이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인간의 계산으로 판단하기에. 일부 인사가 예수님을 지지하자 바리사이들은 “너희도 속은 것 아니냐?”라면서 되레 호되게 꾸지람이다. 이는 당시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라며 그들은 꾸짖듯이 니코데모마저 몰아 부친다. 그는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던 바리사이였다. 참 신앙인은 주님께서 보내시는 일꾼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그들은 모른다. 어찌 주님께서 ‘장소’에 매달리실는지요? 이 빤한 사실마저, 그들은 아예 망각하고 있다. 신심 깊은 이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거다. 자신이 만든 종교만을 믿기에. 사실 신앙은 신념이 아니다. 기술도, 전통도 아니다. 주님 목소리를 따르는 행위이다. 그분 말씀은 성경에도 있지만, ‘자연’속 곳곳에 있다. 바람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게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자연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면 성경의 향기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이를 모르면 ‘현대판 바리사이’를 어느 누구도 감히 극복할 수가 없으리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은 착각과 편견을 낳는다. 이 욕심으로 깨닫지 못한다. 신앙은 믿기에 그저 따르는 행위다. 권력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이는 사기꾼으로 매도된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그들 마음이기에,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담을 수 없다. 그들은 선한 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지 못하고, 약점과 실수를 들추며 확대시킨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서, 실은 ‘자신의 능력’만을 자랑한다. 그러기에 가끔 우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틀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머물러보자. 그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일 게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속담처럼 인간적 지식이 때로는 삶의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하곤 한다. 많이 안다는 게 행복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신심을 깊게 하지도 않는다. 지식과 신앙심은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게 신앙을 키워 주고 사랑이 움트게 만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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