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5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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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3-17 | 조회수381 | 추천수4 | 반대(0) |
‘요리(料理)’라는 말의 뜻은 ‘헤아려 다스린다.’라고 합니다. 요리사, 주방장, 쉐프는 헤아려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음식을 만드는데서 저는 요리할 줄 모르는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사골 육수에 꽁치 통조림을 넣고, 거기에 소시지 볶음을 넣었습니다. 어묵과 떡국 떡도 넣어서 끓였습니다. 헤아림이 없어서인지 맛이 신묘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꽁치 통조림에는 묶은 김치가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사골 육수에는 담백한 재료가 좋다고 합니다. 재능도 없고, 노력도 부족하니 앞으로도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끔씩 정성과 맛이 깃들여 요리된 ‘반찬과 국’을 주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쉬운 것부터 하나 둘 배워나가면 저도 음식 재료를 헤아려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아침은 헤아려 다스리기 쉽습니다. 떡과 계란 그리고 우유와 과일 한 쪽이면 진수성찬입니다. 대한민국은 총선을 앞둔 선거의 계절입니다. 정당은 ‘공천’이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후보를 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과 현실에 다가온 위기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선거는 어쩌면 잔인한 요리인 것 같습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서 여러 후보가 준비하지만 결국 선택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정당의 후보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이 당선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은 ‘투표’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왜곡된 정보와 진실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는 후보, 허황된 공약을 남발하는 후보, 비리와 부패에 연루된 후보를 요리에서 배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준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요리 능력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멀리 타국에 있지만 2024년 총선이라는 요리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성찬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문제를 요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면서 무한을 생각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습니다.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유교는 ‘우환(憂患)’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천명을 따른다면 우환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서삼경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으로 우환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고통(苦痛)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 흔들리는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깨달음으로 집착이라는 업보를 끊어버리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두려움(恐怖)’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할 때 사라진다고 합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에게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인의예지와 깨달음 그리고 믿음은 인류가 삶의 문제를 헤아려 다스리는 요리입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교에 의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데리고 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에 따라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천대받고 무시 받았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이방인의 선교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했던 여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용서받고 다시 태어났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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