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근거는?> 복음: 요한 8,31-42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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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애드킨스는 오하이오에 사는 약사입니다. 그녀는 샘슨과 솔로먼이라는 어린 두 아들을 남편 트로이와 함께 키웠습니다. 그런데 남편 트로이가 우울증과 불안 발작 증세를 보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세라와 트로이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치료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노력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각각 여덟 살과 여섯 살이던 2000년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주말을 맞아 세라는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골동품 여행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떠났습니다. 일요일에 세라는 여러 번 트로이에게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호수에 배를 타러 나갔거나 다른 일로 바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다섯 시쯤 집에 돌아와서는 우편물이 현관 앞에 방치된 걸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려고 주문했던 장난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엄마 왔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두 아들을 죽이고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트로이는 이런 쪽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혼란, 의심스러운 충성, 죄의식, 절망, 상호 의존, 불안정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부터 샘슨과 솔로먼을 지켜 낼 것이다. 이 참혹한 불행의 반복을 나에게서 끝낸다.”
수많은 사람이 세라를 도우려고 힘을 모았다. 그녀는 석 달 동안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침대에서 함께 잤습니다. 세라가 충격에서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세상과 악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화가 났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말입니다. 보세요, 그 사람은 나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한테 내가 해 줄 대답은 바로 이겁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든 간에, 빌어먹을, 난 절대로 못 건드려!’” 엄청난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내가 누구냐는 믿음에서 옵니다. 부모와 함께 머물렀던 이 시기에 그녀는 다시 부모의 소중한 딸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내나 엄마라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감정에서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녀의 집은 위험 지대로 선포되었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데 3만 5,000달러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세라는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여성은 자기 아이들이 총에 맞아 살해되거나 폭력으로 자기 집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장례비나 그 밖의 다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카펫에 묻은 피를 닦아 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일까요? 그래서 세라는 이런 참담한 일을 겪은 여성들에게 장례식과 청소 비용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오하이오대학교와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강의합니다. 또 무료 건강 관리 클리닉에서 일하면서 이런 클리닉을 새로 하나 더 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위한 봉사만이 우리 모든 악한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알더라도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진리의 삶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는 게 진리라도 먼저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따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 때 우리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진리를 따를 준비를 마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 노릇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당신을 받아들였을 것이라 하십니다.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실 때 그들은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실제로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도, 하느님의 자녀임도 믿고 있지 못하기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이웃 사랑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 아버지의 자녀라고 믿으면 나는 성장하여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진정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그분의 말씀인 진리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누구에게 좌우될 것 인가가 내가 누구 자녀 인지가 결정됩니다. 참 자유는 나는 그런 것에 좌우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뿐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아버지를 정하는 데 있습니다. 세라 에드킨스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석 달 동안 부모와 함께 잤습니다. 다시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진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분을 보내신 분을 아버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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