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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 51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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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20 조회수130 추천수1 반대(0) 신고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8,51)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불가피하고 불확실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곧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곧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많은 이들 가운데, 특히 에릭 프롬은 「죽음에 관하여」를, 셸리 케이컨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묻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물었다.」를 저술한 ‘아나 아란치스’는 이 책을 통해서 후회 없는 오늘을 위해, ‘이 순간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냐,’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인생을 최대한 누리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중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죽음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데, 만일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고, 삶을 허비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는 무한대의 내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과 지속적인 추억을 만드는 것 또한 잊기 쉽습니다. 또한, 나중에 후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인생의 끝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소중한 시간을,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지 못하고, 그저 허비해 버리며 살아간다고 말하며 이 점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신비롭지만, 피할 수 없는 자연 순환의 일부입니다. 어떤 누구도 삶과 죽음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고, 성공이든 실패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배우고, 상황에 상관없이 매일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하여금 '삶'이라는 여행에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멋진 영감을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은 極과 極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8,52)라고 단정 짓자, 예수님은 “내가 그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8,55) 고 응수하십니다. 사실 진리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中道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은 참 진리와 거짓 억측과의 싸움이며, 이는 지금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라는 말씀의 의도는 글자 그대로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된다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먼저 진리이며 생명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몸소 지키신 분이셨고, 이제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죽음 곧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7,3) 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도가 확연히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8,58) 는 자기 증언은 “우리 조상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8,53) 라는 유대인들의 항변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간의 틀에 묶여 있었기에 쉰 살도 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는 말은 터무니없는 억지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에서 예수님은 전에 있었다, 하지 않으시고 전부터 있었다, 고 표현하셨는데, 이는 전혀 다른 뉘앙스와 시간을 표지하고 있습니다. 전에 있었다, 는 표현은 시간의 과거완료이지만, 전부터 있었다, 는 과거인 어제도 계셨고 현재인 지금까지도 계시다, 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언제나 현재, 지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논쟁은 끝난 것이었기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8,5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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