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주님사랑 깨닫는 은총의 성주간 / 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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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3-24 | 조회수13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사랑 깨닫는 은총의 성주간 / 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마르 14,1-15,47)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교회의 전례주년에서 가장 경건한 때인 성주간의 첫째 날이다. 또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교회는 나뭇가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하면서 부활을 미리 예고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위해 예루살렘 입성하신다. 이를 본 군중은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지만, 수난과 부활이 이 한 주간에 일어난다. 과연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눈여겨 볼 일은, 많은 이가 온전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군중이 빌라도에게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도, 수석 사제들이 그들을 부추겼기 때문일 게다. 그토록 중심 못 잡는 빌라도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제들 시기로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면서도 군중의 부추김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떠넘긴다. 군중과 빌라도가 당대의 지도지인 수석 사제들보다 자유롭고 소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에 어쩌면 찬성하지 않았을 수도. 그렇다면 우리도 영웅 심리를 떠나, 진리와 정의 앞에서 정녕 자유로울까? 윗사람이나 지도자들이 우리를 선동해도 정의를 지킬 수가? 주위의 시정잡배들이 강압으로 위협을 가해도, 과연 진리와 정의를 옹호할 수 있을까? 사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이 외침은 이천 년 전 유다인들의 외침만은 아닐 수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 열렬히 환영하던 이들이 불과 며칠 만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면, 우리 또한 무의식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고함지르는 무리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가 어려울 수도. 그때 군중은 겉과 속이 다른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맞으면 두 손 들어 예수님을 환호했고, 그러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등 돌렸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철저히 배반당하셨다. 그래서 홀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더없이 고독하고 괴로운 길이셨을 게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회개와 자선으로 주님 수난에 동참하려고 나름으로 노력하곤 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고 억울한 이들이 참 많다. 선한 이에게는 억울한 일이 더 많이 당하기도.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다면 이런 불의와 불공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전능하신 그분이 계시기에 무의미하게는 끝나지 않을 게다. 그게 오늘 그분께서 우리에게 안길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인 게다. 가끔 우리 주위에도 사랑하는 자녀를 일부러 고생스러운 일에 내맡기는 부모들이 더러 있다. 충분히 보상받을 그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기에. 예수님 수난과 죽음은 그 이상이다. 이처럼 그 고통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그 무언가의 신비의 보상이 분명히 있다. 예수님 수난에 고함지르며 동참하는 그 군중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상대방의 생각이 내 뜻과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등 돌리기도 한다. 내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친구는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기도. 폭력과 죽음의 문화는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는 생각조차 귀찮다. 이 모든 게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리라. 그러면서 우리는 ‘나는 아니겠지?’하는 마음을 갖기도. 우리가 저지른 죄로 주님을 배반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주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어야만 할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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