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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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3-24 | 조회수185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사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한결같음이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그림과 더불어 위 짧은 말마디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깊은 내공의 믿음을 반영하는 한곁같음입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와 더불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산 어른의 다음 3월24일 오늘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마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 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늘 가톨릭신문 글로벌칼럼 난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한 로버트 미켄스의 글에서도 교황님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 계속 전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나이들면서 건강 약해져도 오히려 더 큰 결단 보이는 중, 반대 세력과 급진 세력 모두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주눅들지 않고 교회 이끌어”
이런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미소띈 얼굴 표정을 짓는 교황님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가톨릭신문에서 소개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가톨릭교회 26분의 사제와 사제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한 3분 사제 역시 한곁같은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은 흡사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때 장애물 경기는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요! 일상의 삶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온갖 지혜와 용기로 타개해 나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신망애 정주의 삶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성지주일부터 시작된 성주간은 가톨릭교회에서 파스카 신비가 실현되는 절정에 속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성지주일의 긴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한결같음이 어둠을 밝히는 빛같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한결같이 제 강론을 올려주는 형제의 댓글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마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전날 하루의 성찰과 고백과 감사와 찬미의 삶의 결정판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니다. 항상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 한줄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멘.”
어둔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님이 참 경이(驚異)롭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세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덕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중에도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후 전개된 수난복음의 목차를 정리해봤습니다.
(마르14,1-15,47) 1.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2.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다 4.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5.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6.성찬례를 제정하시다 7.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8.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9.잡히시다 10.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11.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2.예수님을 조롱하다 13.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4.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숨을 거두시다 18.묻히시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과 수난을 겪어낸 주님의 한결같이 깊고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산나!" 당신을 환영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침에도 한결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상시 참으로 듣고 배움에 충실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종이 고백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한결같이 듣고 배우는 공부에 충실하셨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어 제2독서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또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토요일 제1저녁 기도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복음의 요약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하느님 향한 사랑의 비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백인대장의 다음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앞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더불어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수난복음 마지막 묘사,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여인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수난복음의 누구에게서 나의 얼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수난복음에서는 물론 평생 삶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비움이 파스카 신비의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어떻게?” 저는 셋을 권합니다.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주님처럼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닮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열렬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처럼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한결같은 배움과 비움, 닮음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의 감동적인 두 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니, 이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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