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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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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24 조회수138 추천수5 반대(0) 신고

[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마르 15,1-39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그러면 스스로 배 만드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도구와 기술은 배를 만드는 ‘수단’입니다. 그 수단을 손에 쥐어주면 배를 만드는 작업 자체는 아주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를 왜 만드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 그 배를 타고 나아가 도달하게 될 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 ‘목적’을 모르면, 그 목적지가 얼마나 좋은 곳이고 내 삶에 어떤 참된 기쁨과 의미를 줄지 ‘희망’이 없으면, 배를 만드는 과정이 작은 난관에만 부딪혀도 중단되거나, 배를 다 만들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표를 잃은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신앙이라는 배를 만들어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게 하고 싶다면, 그래서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참된 행복의 나라에 도달하게 이끌어주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이라는 바다는 그 사람에게 더 이상 고통스럽고 두려운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기쁨의 항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어기지만 않으면 되는 율법, 벌 받지 않기 위한 계명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이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들린 마귀들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고통스럽게 살다 죽어간 가련한 이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음식에 대한 결핍으로, 사랑과 희망에 대한 결핍으로 기 죽은 채 살아가던 이들을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전능하신 분인지, 그런 분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분명한 표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표징을 알아본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분만 따르면 고통과 불행이 끝나고 기쁨과 행복이 시작될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길에 도움이 된다면 하나 뿐인 ‘겉옷’을 내어드리는 일도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왕국’이 도래하기만 하면 자신이 봉헌하고 희생한 것보다 훨씬 큰 보상으로 돌려받을거라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와 바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무너뜨리고 당신 왕국을 건설하실 것 같던 그분이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하십니다. 당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욕심, 뜻, 고집은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하십니다. 왼쪽 뺨을 맞았으면 복수할 생각 말고 오른쪽 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가까운 이웃 형제 뿐만 아니라 이방인,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말씀들에 제자들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얻어 먹으려고 그분을 따라 다니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분을 따르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는데 고통, 박해,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시니 실망이 크고 더 이상 그분을 따르기가 두려워졌던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 대한 환호가 순식간에 분노로 뒤바뀌고, 그분을 환영하며 흔들던 종려나무 가지는 그분의 등을 매섭게 할퀴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위해 겉옷마저 기꺼이 내어드리던 이들은 그분의 속옷까지 벗겨가고, 악을 써가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나귀 등에 올라타셨던 그분은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올려지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예수님께 열렬히 환호하며 추종하다가 순식간에 돌변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쓰는 이들이 바로 신앙생활하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기대하고 바라는게 있을 때에는, 그분께서 나의 바람대로 이뤄주실거 같을 때에는, 그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비굴하게 굴지요. 그러다가 내 뜻과 바람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나한테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그분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냉정하게 등을 돌려 버립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만큼, 그분께서 ‘당연히’ 나의 바람을 이뤄주셔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분께 순명하려는 마음보다 그분을 이용하여 내 뜻을 이루려는 욕심이, 그분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던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은총을 받는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신 참 하느님이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비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당신 목숨까지 바치시는 완전한 순명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완전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한 그 참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은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군말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세례받았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매 순간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심지어 죽음의 위기가 닥쳐와도 힘과 용기를 내어 끝까지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제게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제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존경받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저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저에게 모든 이를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주께서 제게 바라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미국의 어느 병원에 걸려있는 <환자의 기도>입니다. 내 마음이 욕심과 교만에 물들어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이런 참된 순명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가 부활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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