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유다마냥 완고한 우리일지라도 / 성주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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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3-27 | 조회수13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유다마냥 완고한 우리일지라도 / 성주간 수요일(마태 26,14-25) 성주간 성삼일을 앞둔 우리는 어떤 길을 가며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는지를 잘 아는지? 주님 길 따라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면서 꿋꿋이 가는지, 아니면 예수님 팔아 내 뜻을 이루려는지 자문해 보자. 그분 길은 처음부터 십자가 진 그 길이었다.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배반할 제자로 삼으신 것의 후회도, 나아가 당신의 억울한 그 죽음을 불행으로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분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만은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하고 끝내 말씀만은 남기셨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는,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실 작정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가감 없이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자기가 오랜 기간 따랐던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어떤 이는 유다의 배반을 두고,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숙명에 놓였던 거라고 반문한다. 이는 유다 한 사람만의 배반의 유무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 함께 엮였음을 여긴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을 팔아넘길 거라셨다. 이처럼 굳이 예고까지? 이는 그분께서 끝까지 그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당신을 배반하지 않기를 바라셨기에. 우리도 종종 ‘예수님께서 유다를 부르지 않으셨더라면?’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끝내 외면하였다. 그가 예수님 마음을 조금 헤아렸다면, 그분을 팔아넘기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게다. 예수님은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을 때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답하셨다. 배반하고 안하고는, 너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이처럼 그가 자유롭게 행동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다의 행동은 그분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정해졌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예수님은 왜 이런 유다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배신할 줄 뻔히 아시면서도. 물론 예수님은 유다의 모든 것을 아셨지만, 제자로 부를 때만큼은 죄다 따져서 부르신 게 아닐 게다. 어쩌다 나중에 침 뱉고 돌아서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사랑은 꼭 따져서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란다. 어쩌면 유다의 종말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숙고하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의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그분께서는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나 당신 자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모욕과 수난을 당하시면서 언제나 우리를 당신 제자로 삼으셨다. 그리고 각자 처지에 따라, 있는 그 모습 그것을 보시면서 사랑해 주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을 남용한 유다는 결국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주신 자유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묵상하자.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끝까지 회개하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결국 배반했다. 우리역시도 주님 부르심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님 제자가 되었지만, 자주 자주 그분을 배반한다. 이 성주간에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그 발치를 얼마나 충실히 따라다녔는지를 뒤돌아보자. 잘못을 고백하는 겸손과 자유 의지를 바로 사용하는 지혜가 가득한 삶을 살아야겠다. 아마도 가끔은 뜻하지 않게 ‘유다처럼 완고한 마음’을 지닌 자신 모습에, 뉘우침과 부끄러운 죄의식이 스밀지라도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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