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19, 28. 30)
고통에 낯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긴 삶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묻게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장 오랜 질문은 고통은 ‘왜?’라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또한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몇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한 소녀가 울면서 교황님께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소녀는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말이 아닌 눈물로써 표현했어요. 울 수 있을 때만 너의 질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단다. 어떤 사실들은 눈물로 씻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성금요일의 시선은 온통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으며 저의 시선 역시 동일합니다. 그 까닭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에 대한 관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느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실이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만져지고 체험되는 삶이었고 죽음이며 부활입니다. 그분은 들을 수 있는 말씀이며 관상할 수 있는 사건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저희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자기 실존의 자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가슴에 자리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창립자는 예수의 십자가가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놀랄만한 업적임을 또 그분의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기적 중의 기적, 순수한 사랑의 업적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고통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입증하고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거룩한 고통의 바다는 하느님 사랑의 바다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 이 두 바다는 진실로 하나일 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예수의 고난이 사랑의 일이며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업적임을 직관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닙니다. 성 요한은 이미 이를 이렇게 단순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요3,16)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수의 고난이 지닌 이 차원을 잃어버렸고 망각되어 왔습니다. 구세사는 한마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왜 사랑이신지 그리고 이 사랑이 무엇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특별히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그분 수난의 십자가 여정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가 들려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성 아오스딩은 그의 서간집에서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높이 못 박혀 있는 십자가의 횡목은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위에 팔과 손이 펼쳐져 있다. 십자가의 꼭대기에서 아래에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은 마치 인내의 가치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시는 것처럼 똑바로 선 자세로 계시다. 십자가의 횡목이 종목을 가로지르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머리가 앞으로 나오는 그 지점에서부터 십자가 꼭대기 부분,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땅에 박혀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 부분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의 깊은 뿌리를 의미한다.』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마태26,39)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죄의 무서운 징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궁극적인 결과까지 감수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1코15,3) 라는 말의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손상된 하느님의 영예를 위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구체적으로 악과 죄라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현실의 한계와 구체적인 충돌의 결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그리고 오늘의 많은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 지도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단죄받고 죽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 평화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 모든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3,16) 는 말씀의 실현이며, 그것의 시작도 사랑이며 마침도 오직 사랑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외침이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15,34) 이 외침은 하느님 아버지의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만 외아들 예수와 함께 고통당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외아들 예수와 함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드님을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유롭게 풀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대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오로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예수와 동행하며 그의 고통과 절망을 겪으면서 다만 아들에게 용기를 갖도록 함께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요3,16) 는 표현 이상으로 하느님의 마음과 그 태도를 잘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아드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반영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향하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사랑이다, 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하고 중요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즉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부활을 관상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인간의 고통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는 체험과 그 믿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사랑의 역설을 삶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목마르다.” (19,28) 하고 말씀하심은 바로 우리 사랑의 응답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제 시선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과 지진으로 죽어간 이들과 난민들에게 쏠려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으로 나약한 아이들과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삶 가운데 현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