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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주님 수난 성금요일(2): 요한 18, 1 - 19.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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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29 조회수153 추천수1 반대(0) 신고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19, 28.30)


성금요일 전례는 말씀의 전례 곧 예수님의 수난기가 중심이 되는 전례입니다. 이후 예수님수난의 압도적인 표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배 예식이 첨가되면서 더 풍     부하고 풍요로운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이 완결完決되었습니다. 

오늘 수난기와 십자가 경배의 중심 장소는 ‘해골터’라는 곳으로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합니다. (19,17) 골고타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고 죽으신 곳으로, 또한 예수님께서 묻히시고 부활하신 곳이기도 하며, 훗날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곳입니다. 현재는 예수님의 무덤 성당이 있는 곳이 바로 골고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기의 시작은 어두운 밤중 게세마니 동산에서 출발하여 태양이 뜨겁게 비추는 한 낮 해골터라는 골고타에서 마칩니다. 예수님의 투옥과 고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수난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한 숱한 모욕, 그 수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때론 많은 영화에서 폭력적인 고문의 장면들이 재현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진 채, 채찍질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며,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들이 성가 「보았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노래한 흑인 복음성가의 음률과 함께 아픔으로 밀려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19,7)라고 하자,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 폐를 달았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숱한 놀림의 대상, 무죄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겉옷을 벗겨 네 몫으로 나누어 가지고 속옷을 가지고는 제비를 뽑는 그들의 저 무모함과 무심함이 역설적으로 이 순간의 고통을 더 강렬하게 말한 듯싶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주님의 침묵과 인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침묵을 깨뜨리시고 남긴 일곱 말씀에서 주님의 관심은 당신이 당하신 고통보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시고 위로하셨음에 참으로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자신보다 하느님을 먼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이타성은 어머니를 보살필 사랑하는 제자를 선택하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목마르다.” (19,28) 는 말씀을 통해서 고통에 따른 무거운 탄식을 쏟아내시지만 이는 당신의 목마름보다 사랑과 생명으로 타는 목마름과 갈증을 느끼는 우리의 상태를 일깨우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성당 감실 위에는 목마르다, 는 말씀이 새겨진 것은 바로 오늘 세상의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목마르다, 는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갈망을 통해 세상의 갈망을 드러내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요한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존재와 삶의 모든 활동을 상징적인 한 말씀으로 귀결 짓는 “다 이루어졌다.” (19,30) 라고 외치시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너무나 아파하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런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교회는 훗날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상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습니다.』(니케아 신경)라고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치욕스럽고 혐오스러운 사형 방법이었으며, 그러기에 교회가 십자가를 굴욕의 상징에서 희생적인 사랑과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무려 4세기가 되어서야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라고 노래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십자가 경배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으로 가져온 사랑과 구원에 감사와 찬미 그리고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온갖 수치심과 슬픈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그날과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기억하며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간이 바로 구세사의 특이점의 순간이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시간 나는 어디 있었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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