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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빵을 떼실때에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_이영근 신부님_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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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03 조회수128 추천수3 반대(0) 신고

독서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를 일으키는데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은 없으나 유일하게 나에게 있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가톨릭 성가에서 생각이 나는 서산의 노을이 고우나 우리와 함께 가시옵소서 라는 성가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의 11 제자가 아닌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잃은 슬픔에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밤이었습니다. 밤이 상징하는 것은 영혼의 어둠의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주님의 부재 상황입니다. 주님이 않계시면 모든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요 몇 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이 그들 사이로 들어가십니다. 무슨 일이냐 ? 그렇게 물어 보시니 그들이 침통한 표정을 하면서 이야기 합니다, 글쎄 우리가 따르던 구세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가 보니 주님이 무덤에 않 계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여인들 앞에 나타 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돈 스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성서에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에 대해 기술한 것을 그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시어서 주님은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님을 알아봅니다. 순간 주님은 다시 사라지십니다. 그들이 눈이 열리는 과정이 말씀과 빵입니다. 그것은 미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보는 과정에서 빵을 떼어 내시는 순간 알아봅니다. 빵이 쪼개지는 순간을 말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인간의 본성으로 가득 찬 것이 깨어지고 주님이 그들 마음 속으로 영혼의 숨을 불어 넣으므로서  바로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철두 철미하게 내가 쪼개 지지 않으면 주님을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부서지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성전은 주님의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서 우리를 개혁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가 그리스도화 입니다. 오늘도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겠습니다. 아멘 

-최원석 요한-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픔에 빠져,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루카 24,17) 

“무슨 일이냐?”

(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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