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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꽃힌 신부 ★ 제2부 06 미저리적 신앙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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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손분조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05 조회수127 추천수5 반대(0) 신고

 

 

pp137-142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제2부 내맡김의 비법과 진리
06 미저리적 신앙의 위험성
2010. 03. 10.


과거에 관람했던 영화 중에서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섬뜩한 영화가 
바로 <미저리>라는 영화다.

어느 소설가가 눈으로 뒤덮인 깊은 산속에서 
소설 집필을 끝내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 마을에 살던 그의 열렬한 팬인 전직 간호사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가 쓴 소설을 읽어 본 그녀는 
그에 대한 잘못된 애정으로 편집증 증세를 보이며 
자기 의도대로 소설의 줄거리를 바꾸기를 강요하면서 
그에게 더욱 집요한 간호를 기울인다.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의 태도는 돌변한다.
그에게 가해지는 폭행과 약물 주사와 감금은 정말 끔찍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소설은 그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의도대로’ 쓰여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쓰인다면 
비록 그 작가의 손에 의해 쓰였다 하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이 아니다. 

소설이 작가의 의도대로 쓰여야 하듯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은 ‘하느님의 의도(뜻, 섭리)대로’ 행해져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정성’이 아무리 지극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 기도와 정성은 
영화 <미저리>의 여주인공이 소설가에게 퍼부어 댄 ‘집요한 간호’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외적 신앙 행위’가 자신의 신앙과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미사 참례와 성사 생활, 성체 조배, 묵주 기도, 자선과 봉사 활동, 
단체 생활, 여러 피정과 강좌 참여 등에 충실하다면 
그것으로 신앙생활에 열심한 ‘성실한 신앙인’이라 
스스로 안위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구원의 필요조건’을 다 충족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신앙의 외적 행위, 외적 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신앙과 구원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드러나는 외적 신앙 행위로만 
다른 사람의 신앙심을 판단해서도 안 되며, 
신앙인 스스로 거기에 안위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 행위며,
구원의 필요조건을 전부 충족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 방식대로’‘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긴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느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지도 않으면서, 
하느님께 그것을 늘 여쭈어보지도 않으면서, 
내 방식대로만 그분께 해 드린다면,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만 해 드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미저리Misery(비참) 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왼쪽 등이 가려운데, 오른쪽 등을 긁어 주는 꼴이다. 
가렵지도 않은 곳을 긁어 주면 
가려운 곳은 더 가렵게 되고, 긁어 준 곳은 아프기만 할 뿐이다. 
상대의 어느 곳이 가려운지 먼저 물어보고 긁어 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의사를 늘 ‘물어본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사대로 다 해 준다.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척’하면 ‘착’이다. 
텔레파시가 통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하느님께 늘 ‘여쭈어본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해 드린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냥 ‘척’하면 ‘착’이다. 
영감을 주셔서 ‘영감’이 즉시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손에서 묵주를 떼지 않고 
틈만 나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도,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여 뉘우치며 고해성사에 자주 참여하면서도, 
한주간에도 여러 시간을 성체 조배실에 꿇어 앉아 
주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새기면서도, 
적지 않은 교무금과 헌금을 내고 
자선과 봉사와 단체 활동에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면서도, 
‘다른 이에 대한 배려’에는 너무나 무관심한 신앙인이 있다.

과거에 지인 몇 분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중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 부모에게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란 분이 계셨다. 
무엇보다 소위 신앙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한 분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 경험에 매우 자신감이 넘쳤다.

그럼에도 그분은 
자신의 경험이나 거기에서 얻은 지식만이 가장 옳은 것처럼 말하고, 
무엇보다 자기 이야기만 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이야기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정말로 놀랍게도 
다른 사람의 말을 도중에 끊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이야기가 
‘신앙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대화’가 사라진 경우는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까지도 말하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 대한 배려’에 무관심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원의를 헤아려 주는 ‘아량’이 있다.

하느님은 미사나 고해성사나 성체 조배에 전혀 굶주리지 않으신다.
우리의 교무금, 헌금, 예물, 자선금 등의 돈에 전혀 굶주리지 않으신다. 
우리의 외적 활동에도 전혀 굶주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반사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굶주려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그분의 원의를 채워 드리려면 그분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부분들(미사 등 성사 생활과 외적 신앙 행위)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전체가 부분을 인도하는 것이다.

순서가 뒤바뀌면 신앙생활에 많은 힘이 든다.
올바른 순서는 신앙생활에 큰 은총과 활력을 준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외적 신앙 행위들’은 
오히려 하느님을 ‘비참하게’ 해 드릴 뿐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신앙적 미저리’를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하느님을 ‘미저리’ 하게 하는 ‘머저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이사 1,13)

“율법을 듣지 않고 귀를 돌리는 자는 그 기도마저 역겹다.”(잠언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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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참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사는 것,

즉,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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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구 청주 제주 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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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가톨릭회관 333호

☎ 070-7785-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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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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