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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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4-05 | 조회수397 | 추천수3 | 반대(0) |
인내(忍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忍)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낼 정도이니 그 아픔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耐)는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염을 하나씩 뽑아내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습니다. 가시관을 썼고, 창에 찔리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달리는 중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완주 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통증일 뿐입니다. 아이는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그 통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주사의 통증을 알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야 더 큰 통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통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독화살을 맞은 팔의 독을 치료할 때 통증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체력도 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과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증과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뇌는 사회와 역사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제 ‘인사적체’가 심각했습니다. 저의 선배 사제들은 보좌신부 4년 하면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보좌신부 8년을 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8년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직책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보좌신부로 20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구는 ‘협력사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사목을 한 다음에는 특수사목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교구에서 이런 제도를 보완하기 이전에 몇몇 선배 사제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본당신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좌신부님들이 본당신부가 될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기꺼이 받아 주셨고,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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