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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마르코 16, 9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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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05 조회수137 추천수2 반대(0) 신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15)


오늘 복음은 부활 사화의 요약본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16,9~11참조) 나타나셨으며, 그 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16,12~13참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6,11.1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까지 믿지 않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16,14) 이는 우리 역시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강론이나 교리 등을 통해 부활을 가르치는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한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들처럼 우리 역시도 자신이 보는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이며 전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다는 증좌證左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역시도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야말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돌을 굴러 낼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성령강림’임을 우리는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짧은 내용 중에 무려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3번이나 반복됩니다. 믿지 않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실망이 잘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신뢰하고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사실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마태11,25)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남아 있다, (마태17,20참조) 고 확신하셨습니다. 훗날 성령을 받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15) 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중히 경고”(사4,17)를 받지만, 무식하고 평범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4,19~20)하고 고백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이며 부활을 체험한 복음 선포자의 확고한 신앙고백입니까?

본디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4,13)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변화를 유다 지도자들 역시 알아차릴 만큼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고 투철하게 증언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의 놀라운 변화를 알고 그들의 엄청난 선포는 듣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진중한 말과 그 삶의 변화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능력을 그들 또한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사4,16) 하고 고백할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4,19.20) 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쪽팔렸을까 상상하니 고소합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시118,14)

오늘 우리가 접하는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아니면 변할 수 없다는 것 중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만일 변할 수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저는 변할 수 있다고 보며, 그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극심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사람이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변화는 가능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자신을 되찾게 해주신 하느님을 자신들의 존재와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해 주신 분들입니다. 부활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사람은 변한다, 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변화할 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15참조) “부활하신 주님 당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아직 온전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령을 저희에게 내려 주십시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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