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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 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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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06 조회수338 추천수5 반대(0)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모호하지만 명확하다. 자연은 덧없지만 풍성하다. 우주는 무한하지만 무관심하다.” 인생에서 명확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터널과 같습니다. 암흑과 같은 터널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자연은 이렇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개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게 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우주를 있게 한 절대자를 떠올립니다. 신앙인은 그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이외에 우주라는 커다란 화폭 위에 별들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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