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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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09 | 조회수21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63,2)
오늘 화답송 시편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공통적 진솔한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4월2일 부활 축제 팔일 화요일에 선종한 베네딕도회 전 수석아빠스 노트커 볼프 아빠스를 위한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이야말로 전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회 역사에 전설과 신화가 된 참 걸출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부활 팔일 축제중, 이탈리아에서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는 일행과 함께 하던 아빠스님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자 급거 귀국,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룻밤을 묵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문득 아시아에서의 베네딕도회 모임차 순례 여정에 올랐던 트라피스트회 수도승 토마스 머튼이 방콕의 자신의 방에서 1968년 선종하신 사건이 연상되었습니다. 두분 다 길에서 태어난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돌아가시니 길이신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분들입니다.
제가 볼 때 예수님의 제자답게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다운 삶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순간 아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란 말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었던 노트커 아빠스님의 생애를 일람했을 때 느낌은 정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이셨구나, 매일 하루를 끝낼 때 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고백이 뒤따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노트커 아빠스님은 사부 성 베네딕토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의 순례 여정중 주님의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선종하신 것입니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에 돌입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그대로 선종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아빠스님이요, 아니 이미 살아 생전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영생의 삶을 사셨던 아빠스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영적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늘 여기 오늘 지금을 살았던 아빠스님이요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함을 배웁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에 관해 참 많이 말합니다만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최종 시험에 해당되는 죽음이요 그 시험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대구시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직자묘지 입구 기둥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짧은 구절도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합니다. 이런 죽음의 자각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를 살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나는 라틴어 경구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라”는 말입니다.
노트커 아빠스님을 보면 하루하루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940년에 태어나 2024년 선종시까지 84세까지, 저보다 9세 연상이셨지만 그 삶의 질이나 삶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23년동안 오틸리엔 수도원은 물론 오틸리엔 연합회를 책임진 최고의 장상이었고, 이어 세계 베네딕도회 수석아빠스로 4차례 16년 동안 연임하셨으니, 무려 39년 동안 최고 장상이 되어 한결같은 열정을 쏟으신 것입니다.
아마 아빠스님처럼 선교 여행을 많이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친화력에 참 자유로운 분이셨고,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안에 정주한 베네딕도회의 전형적인 선교 수도승 아빠스였습니다. 아빠스님에 대해 평전이 나온다하면 스토리와 컨텐츠가 참으로 풍성한 대 서사시 같은 한권의 성서같은 평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베드로의 깨달음은 노트커 아빠스님의 깨달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를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세계 곳곳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수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친교를 나눈 아빠스님이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었고 타고난 선교사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처럼 노트커 아빠스 역시 “보편인(universal man)”이자 “세계적인 수도승(grobal monk)”이었습니다.
수도승들에게 은퇴란 없고 죽을 때까지 영원한 현역으로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만이 있을뿐이요 선종시까지 이의 모범을 보여준 영원한 현역의 아빠스님이셨습니다. 장상직을 내려 놓은 후 고향집같은 오틸리엔 수도원에로 돌아가신후에도 눈부신 활약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모든 공직을 내려놓은후 오틸리아 수도원에 귀원후, 흡사 추도사처럼 생각되는 일부 활동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도원의 미래 계획, 기금 모음, 대중 연설등의 분야에서 수도원에 관여하였으며, 공동체 토론에서 항상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또 강연,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출연, 피정, 전례, 각종 행사등 독일과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상적이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는 철두철미 자기훈련과 동료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큰 기대감 때문에 때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관리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영감과 기쁨을 주었기에 그의 거대한 프로그램은 항상 그에게 삶의 영약(靈藥)이었습니다. 노트커 아빠스가 받은 30개가 넘은 영예와 상 중에서 바이에른 공로 훈장, 독일 연방공화국 대십자 훈장, 바이에르 주 사회 공로 훈장, 두 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그뢰넨 바흐등 여러 명예 시민권등 참으로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고인이 생전에 뿌린 많은 씨앗에 감사드리며, 그의 마지막 위대한 여정이 그가 평생 동안 선포한 그 길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저절로 노트커 아빠스님을 통해 놀라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그대로 노트커 아빠스님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노트커야!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립시다. “주님, 노트커 아빠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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