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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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4-09 | 조회수22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24년 04월 09일 화요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시기 전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봉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 시기에 읽었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면서 최고 지도층 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 하늘로 올라간 이”이심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의미는 해당 그리스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노쎈’으로, ‘오래전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도 있으며, ‘처음부터’라는 뜻은 ‘하느님에게서’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에 읽었던 이 내용을 부활 시기에 다시 읽는 이유는, 부활이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은 다릅니다. ‘태어남’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다시 태어남’은 참된 구원을 선택하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을 증언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변에 궁핍한 사람이 없게 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모두 큰 은총을 누립니다. 덜 교만할 때 덜 고집스러워지고, 덜 고집스러울 때 덜 두려워하게 되며, 덜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곧 부활의 삶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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