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부활의 기쁨은 죽음에서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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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4-11 | 조회수18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부활의 기쁨은 죽음에서 / 부활 제2주간 목요일(요한 3,31-36)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를 냉정히 분석, 토론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려면 그 쪽 전문가에게는 최소한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고 땅의 것만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신 분은 그분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하늘 일’을 알아보려면 의당 그곳에서 오신 분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로 들어보고 묵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신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그분만이 온전히 아신다. 문제는 그분 증언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리 없다는 거다. 막상 그것을 확인하려 해도 난감할 수도. 신앙의 증거는 오직 스스로의 체험으로만 가능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널리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게다. 진리는 결코 만들어지거나 몇몇의 생각으로만 정의되는 게 아니다. 진리는 모든 이에게 의당 받아들여지고 가치와 논리에 타당해야 하니까.
20세기 지성인으로 무신론적 철학자요 뛰어난 문필가인 프랑스의 사르트르는 신앙 없어도 인간은 족히 선할 수 있다며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던 그가 임종 시에는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온갖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단다. 결국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리라.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외친 그의 말로가 왜 그토록 비참했던가? 그는 왜 괴로워하며 죽어야만 했던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소의 실망과 아쉬움을 담은 어느 독자가 기고한 내용이다. ‘사르트르는 분명 신앙인이 아니다. 그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것은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에.’ 무신론자의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안에만 있기에 밖에서는 열 수 없단다. 천사가 도우려고 문을 수도 없이 두드려대도 결코 열 수는 없으니까.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그토록 모시고자 다가가도 피하기만 하는 분도 이처럼 마음의 문이 늘 굳게 잠겨 있기에 그럴게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게 대단히 어려울 게다. 사르트르는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비참했던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도, 그 값진 희망도 없었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세상에 너무 얽매여 ‘하늘나라’에 대해 소홀하지는 않을까? 예수님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 후에 복음이 보편적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확신했기에, 주어진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기쁘게 복음을 전한 것이리라.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도처에서 왜곡되고 은폐하며 만들어 내는 거짓 내용에 당당히 맞서야만 할 게다.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무고한 죽음을 이겨 낸 십자가에서 드러난 부활의 기쁨을, 진리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널리 선포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늘 기억해야만 하지 않을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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