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고귀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어떤 이는 늘 부족함이 없고, 또 어떤 이는 늘 목마름 속에 살아가는 것일까? 그 간극에 우리의 냉정함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어주고 나누며 산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행위에 ‘충분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3,16) 여기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사건, 피조물 곧,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고 접하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폭이 넓다.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 또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한없는 사랑은 ‘외아들’을 주심으로써 극에 달했다. 곧, ‘외아들’이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가장 귀한 것,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씨앗을 말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은 당신 전부를 남김없이 이렇게 건네주셨다.
16절에서 사용된 ‘사랑하시어’와 ‘내주셨으니’는 모두 과거형이다. 곧, 이는 육화와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3,16) 하려는 것이었다. 그분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시려는 그분의 절절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분사형의 ‘믿는’이라는 동사는 신앙의 계속성을 말해준다. 곧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항구하게 믿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3,18). 사랑은 사랑이신 분을 향한 결단이요, 계속적인 움직임이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 없이는 자신을 올바로 알 수도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모두를,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보고 싶은 사람과 보기 싫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구별 없이 사랑하여야 한다.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항상.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한없이. 어디서 사랑할 것인가? 어디에서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통째로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귀감이며 창조적 원형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베들레헴에서 골고타 산상에 이르는 절절한 사랑. 그 사랑은 ‘생명 전부를’ ‘무조건’ ‘끝까지’ ‘인간의 죄나 처지에 관계없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보편적,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 삶의 방식이자 존재 이유요 삶의 방향이요 목적이며 성장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남에게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맡기는 사랑’이며 ‘원하는 대로 해주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절망적인 순간에도 허탈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신 분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마치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절망감과 허탈감에 빠져 엠마오를 향하여 걸어갔듯이 쓸쓸한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극진한 사랑으로 당신 전부를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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