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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부활 성야 강론/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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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1 조회수155 추천수0 반대(0) 신고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부활 성야 미사는 물론 당연히 사제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부활 성야 미사는 혼자 사제관에서 드렸죠.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하자 했는데 잠만 자서 혼자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신자 세 분이 오시어 같이하게 되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빛의 예식이라든지 이런 것은 사정상 할 수가 없지요.

저뿐 아니라 모든 은퇴 신부님이 그러실 겁니다.

운 좋게 본당에 초대받아 그곳 본당 신부님과 함께 미사 드리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지만 은퇴 신부님 가운데서 초대받아 가는 분은 제가 알고 있는 한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이제 은퇴하면 잊힌다는 얘기겠죠.

은퇴 신부님들이 은퇴하고 후회가 되는 게 그거라고 그러죠.

내가 본당 신부할 때 왜 은퇴 신부님들을 왜 초대를 못 했을까?

그렇겠죠.

내가 은퇴 신부가 돼서 아무도 초대해 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까,

은퇴 신부님 때 누가 불러주지 않고 기다렸던 신부님들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럼, 신부님 누가 불러주지 않아서 좀 서운하신 겁니까?’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런데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러도 안 갑니다. 그리고 불러도 안 온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 부릅니다.

 

자매들은 혹시 도박하러 다닌 적 있습니까?

저는 있어요. 10번은 다녀온 것 같아요.

도박하는 사람들 심리가 어떻길래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알아보려고 갔었어요.

옛날에 젊은 신부 시절 때 딱 만 원을 가지고 갔어요.

1만 원을 칩으로 바꾸어 넣고 앞으로 잡아당겨 수박이 나오면 터지는 것 있잖아요.

그 만 원 가지고서는 제일 오래 버텨본 게 30분이야.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도박장에서 돈을 딸 수 있을까요?

확률이 거의 없어요.

도박장에 있는 기계들은 거의 전부 조작한 거래요.

기술적으로 몇 프로는 맞게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대요.

그러면 돈을 딴 사람을 그다음에 안 올까요? 또 와요.

돈 잃은 사람도 또 오겠죠. 왜? 본전 생각나서요.

그래서 결국 도박장에 다녀온 사람 중 돈을 따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일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도박장, 카지노에서는 볼 수 없는 세 가지가 있어요.

무엇이 없을까?

첫 번째 도박장에는 거울이 없고, 두 번째 시계가 없고, 세 번째 창문이 없어.

거울과 시계와 창문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명문 카지노에는 시계까지 전부 맡기고 들어간대요.

시계를 보면 자꾸 시간을 보겠죠.

아이고 집에 갈 시간 됐네.

가뜩이나 중독성이 강한 도박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장치마저 없어서

한번 시작하면 적당히 즐기고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래요.

 

뭐가 없다고요? 거울과 시계와 창문.

이 세 가지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일깨워 주는 여느 집 같으면 기본적으로 다 있는 것이죠.

거울 없는 집 없잖아요. 유리창 없는 집 없고, 시계 없는 집 없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도박장에서는 돈을 못 벌게 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는 금기래요.

마찬가지로 일상에 우리가 중독되는 영적 나태함의 중독도 도박의 중독 못지않게 위험하겠죠.

어느 순간 영적 중독에 빠지면 사순절이고 부활절이고 성탄절이고 그냥 흘러 지나가는 나와는 아무 의미 없는 행사일 뿐이죠.

올해 성탄 끝나고 밥 주나? 시골 본당 같으면 잔치하죠, 윷놀이도 하고요.

나도 본당에 있을 때 성탄은 추워서 밥만 먹여 보냈지만,

부활은 제일 좋은 시절이라 운동장에서 큰 상품 걸고 줄다리기부터 하루 종일 놀았어요.

그러니 본당 간부들은 그것 준비하느냐 뼈 빠지는 거죠.

한 달 전부터 종목은 뭘 해야 하나, 상품은 뭘 해야 하나.

그러니 부활 준비를 못 하는 거예요. 부활의 의미가 사라져 버려요.

어쩌면 이런 것들이 영적인 일상의 중독이라 볼 수 있죠.

해마다 찾아오는 부활절. 이번 부활절 때는 성모 회장 같으면 뭘 해 먹여야 하나,

국수를 끓일까, 아니면 뷔페를 해야 하나, 또 후원자들도 찾아다녀야 하죠.

그래서 우리들은 무언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장치가 없으면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돌아보게 하는 장치가 무엇이 있어요?

어떤 영성 생활하면서 뭐 어떤 것들이 있는 것 같아

십자가 바라보면 나쁜 생각 하다가도 가슴이 뜨끔하죠.

그리고 주머니에 묵주가 손에 딱 잡히면 분심 중에 있다가도 묵주 기도하자 그렇게 되죠.

그리고 또 유튜브 딱 틀면 누구 목소리가 나와요?(신부님이요)

그렇지, 딴생각으로 헤매다가도 들으면 정신이 바짝 나죠.

아무튼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적인 장치가 꼭 필요해요.

거울처럼, 시계처럼, 창문처럼.

 

여러분들 사제가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만들죠.

그것은 기념하는 것이 아니죠.

정말 그 순간 매일, 하루 세 번 미사 드리면 미사 드릴 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가 만들어져요.

그러면 올해가 2024년인데, 예수님은 2024번 부활하신 거예요?

아니지요. 한 번 하신 거야.

성체 성혈은 매일 미사 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지만,

주님의 부활은 시간이 간다고 해마다 부활을 새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2024번 부활하신 게 아니거든.

그렇기에 부활은 기념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의 성체 성혈 축성은 말 그대로 바로 현재 형이죠.

 

아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건 뭐냐 물었더니 기도라고 얘기했어요.

카지노에서 첫 번째 없는 것이 거울이라고 그랬죠.

거울이 하는 일이 뭐예요? 나를 비춰보죠.

그런데 비춰보니까 여기 얼굴에 뭐가 묻었어.

그러면 거울이 와서 얼굴 닦아주고 가요? 닦는 건 자기가 닦는 거죠.

성서에 ‘율법은 다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거울처럼 율법은 나를 온전하게 거룩하게 못 만들어.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내 죄가 뭔지를 알려주죠.

하지만 결국에 내 죄를 씻게 하는 것은 나의 회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굳은 믿음.

이런 것들이 바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은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을 보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해요.

저녁 기도, 나를 볼 수 있는 훌륭한 기도의 거울이 되겠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거울을 보고 ‘무슨 죄에 떨어졌네’하며 죄의 종류만 알아서는 안 돼.

거울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그다음부터는 내가 해야 하죠.

정말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다시는 이런 죄 안 떨어지겠다는 절절한 반성이 필요한 거죠.

그렇지만 그 시작은 나를 돌아보는 기도의 거울이 꼭 필요한 거예요.

거울을 보면서 기도를 시작해야 해요.

 

또 시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계가 째깍째깍할 때마다 우리가 살날이 많아져요, 죽을 날이 가까워져요?

지금, 이 순간 째깍째깍할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거죠.

시계는 바로 뭐냐? 인간의 유한성을 알려줘요.

삶이라는 건 짧아서 시계를 볼 때 우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를 받게 돼요.

그날 회개할 것은 그날 회개해야지, 내일 하지?

이번에 성사 못 보면 다음번에 보면 되지? 모두 판공 성사 보셨죠?

이렇게 영적인 시계는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분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날이 가까울수록 무서워지고 ‘나 이것도 잘못되는 것 아니야?

내가 이제껏 살았던 팔십 평생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원한 세상에서 지옥 불에 떨어져 사는 거 아니야?’ 하며

엄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도 ‘회개를 촉구하는 시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항상 얘기하죠. 성인 성녀 되는 지름길이 뭐라고 그랬어요?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이 내 하루밖에 안 남아있다.’

내 생이 하루밖에 안 남아있다면 기도를 소홀히 하겠어,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이 다 나지.

암에 걸려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은 그 3개월이 얼마나 소중하겠어?

무슨 얘긴지 이해가 되죠?

 

이번에 세상 떠난 내 동창 신부님이 다른 동창한테 그랬다고 그래요.

마지막 의식이 꺼지기 전 그 마지막 자리에 다른 동창이 있었는데 이 말 한마디 했다고 해요.

‘하느님 앞에 갈 준비는 다 돼 있는데 몸의 고통을 내가 얼마나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몸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 앞에 간다는 기쁨이 퇴색될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우리 모두 공감하는 얘기죠.

주님 앞에는 가고 싶은데, 숨 끊어질 때까지 얼마나 온몸이 다 무너지고 몰핀으로도 통증 컨트롤이 안 되고.

뼈와 근육은 다 빠져나가고 그다음에 가죽이랑 그냥 해골밖에 안 남잖아요.

그렇게 죽는 분들이 있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늘 그 기도를 하잖아요.

‘그냥 밤에 잠자듯이 주님 불러가시면 좋겠다.’

사제들은 1년에 한 번씩 유서를 꼭 써요. 그리고 외국 나가기 전에도 유서를 꼭 써요.

매년 유서 내용이 바뀔 수도 있겠죠.

어차피 영원한 세상에 가기 위한 우리들은 이 지상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보다도 작단 말이지.

많은 죽음을 내가 봐 왔지만, 신학교부터 함께 생활하고 50년 넘게 같이 사제생활을 했던 동창의 죽음은

다른 교우들의 죽음이랑은 좀 느낌이 달라요.

우리 아버지 죽음 볼 때와 또 달라, 확실히 달라요.

또 신학교라고 하는 것은 10년이라는 긴 세월이기 때문에 일반 대학이랑은 전혀 달라요.

유대감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르죠.

그래서 내가 카페에 ‘참 지지리 복도 없다. 어떻게 미사도 없는 날 맞춰서 죽었냐?’

그랬지만 어저께 장례식에서 가만히 생각하니 복이 없는 게 아니라 기가 막히게 찬스를 잘 잡은 거야.

성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내일 부활하시잖아.

내일이 삼우란 말이에요.

그러면 내일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는 찬스를 잡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거예요?

이렇게 죽고 싶어도 못 죽죠.

신부님들도 처음에는 나랑 다 비슷한 마음이었어.

‘세상에 우리 교구에서 사제 장례를 미사 없이 하긴 처음이네. 저 양반 잘살았는데 복도 없어.’

처음에는 안 됐다고 좀 혀를 찼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성금요일에 미사 없이 고별식 예절을 거의 한 시간 동안 했고, 내일은 부활인데 그 신부님 삼우란 말이죠.

저도 내일 운영자 미사가 없다면 가야 하겠지만, 내일은 갈 수 없죠.

기가 막히게 이게 타임을 잘 잡은 거야. 지지리 복이 없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가 카페에 올린 글 수정하려고 해요.

복이 많은 거야. 영적인 시계를 기가 막히게 잘 맞춘 거예요.

그 신부님은 올곧게 살았기에 주님과 같이 부활하게 맞춰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되게 슬펐다가도 ‘참 재주 좋다. 기가 막히게 이렇게 시계를 정확히 맞췄을까?’

우리도 그렇게 복되게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창문이 하나 남았죠?

우리는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죠.

그런데 우리가 보는 영적인 창문은 영원을 봐야 해요.

영원을 지향하는 창문이어야 해요.

여기 사제관 유리창마다 참 아름다워요.

유리창을 특별히 신경 써서 내가 만들었다고 그랬잖아요.

여기는 사방이 다 아름답기에 유리창이 전부 다 액자요, 캠퍼스예요.

하루 종일 유리창을 통해 날아가는 새를 볼 때도 그렇고, 흔들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줄기를 볼 때도

내가 도시 한가운데 서운동성당 유리창을 통해서 봤던 나무랑은 달라요.

도시에서 유리창을 통해서 봤던 것은 형이하학적이지만 여기서 보는 유리창은 보는 세상은 보이는 세상을 너머가 또 보여요.

어떤 때는 구름도 예수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죠.

 

영원을 지향하는 창문,

기도의 거울,

회개를 촉구하는 시계.

바로 이런 것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나를 그때마다 부활하게 만드는 영적인 장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카지노 운영자, 참 머리 좋아요.

거울, 사실은 카지노에서는 돈 버는 데 쥐약이란 말이야.

그게 있으면 돈 잃고 화장실 가서 손 닦고 거울 볼 때 ‘미쳤지. 빨리 집에 가자.’

거울로 다크 서클 생긴 자기 몰골을 보게 될 것 아니야.

또 시계를 볼 때 ‘이게 뭐야? 내가 안 들어간 지가 벌써 이틀이네?’

이것이 전부 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 마음에도 거울이 있어야 하고, 시계도 있어야 하고. 창문이 있어야겠죠.

그 세 가지가 갖춰져 있을 때 우리는 매 순간순간 나를 뒤돌아보면서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다 새로운 부활, 지난 40일 동안 준비를 잘하신 분들은 오늘 부활하겠죠.

그리고 평화의 인사할 때 정말 마음으로부터 ‘부활 축하합니다.’ 하지만

그 준비를 잘 못한 사람은 그냥 영혼이 빠져나간 겉치레 ‘부활 축하합니다.’.

준비를 잘한 사람들은 ‘부활 축하합니다’ 하면서 본인이 기쁘죠.

‘이번엔 정말 고비가 많았는데 내가 새롭게 부활했어.

그리고 이번에 성사 볼 때 그동안 내가 부끄러워서 못 봤던 것 다 털어놓으니, 이제 날아갈 것 같아.’

그것이 부활이에요.

우리 천주교 신자에게 고백성사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주는 나를 부활시키는 천상의 성사, 그렇죠? 예수님이 만드신 거 아니에요?

그것을 안 보려고 하고 도망 다닐 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1년에 두 번 판공 성사 보는 것도 그냥 억지로, 형식적으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들어가면 그것이 무슨 성사예요?

 

다시 한번 부활 축하드리고,

또 부활은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 마음 안에 각자 각자 새롭게 늘 진행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3/3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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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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