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_이영근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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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2 | 조회수18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어'(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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