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빵의 기적』_송영진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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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2 | 조회수23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5-7)”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2-15).”
1) 공관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계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한 제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빵의 기적’은, “예수님은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는(묵시 22,1-2)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1).”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2) ‘빵의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어떤 아이가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9절) 너무 많이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 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어도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비록 예수님께서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시긴 했지만, 기적의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고, 이야기의 핵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려고 하는 기적에, 또는 일으키신 기적에 ‘응답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어떤 아이의 마음과 태도는 훌륭한 것이고, 그 행동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봉헌한 일과(마르 12,41-44)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3) 요한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결코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뒤의 22절부터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추대하면) 예수님께서 날마다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께 ‘땅에 속한 것’을(요한 3,31) 청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구에게나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의 과정일 뿐이고,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배불리 먹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뒤의 27절에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관심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종교가) 세속의 정치를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출처] 부활 제2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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