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6,20)
제가 다녀온 곳 중에서 아름다우면서도 사람과 함께 공존하고 공생한 호수가 어디였지 라고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곳은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접하고 있는 ‘티티카카 호수’, 캄보디아의 ‘톤레삽 호수’ 그리고 미얀마의 ‘인레 호수’ 등입니다. 외적으론 아름답고 낭만적인 호수 같지만, 성경에 나오는 호수는 삶의 양면적인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보자면, 부활은 죽음과도 같은 바다를 건너 저편 땅으로 통과하는 여정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죽음과 생명이 함께 공존하는 호수를 항해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네 인생은 끊임없이 죽음과도 같은 상황을 수시로 직면하면서 호수를 거슬러 생명의 땅으로 나아가는 형국입니다. 불교에서도 이를, “인생은 苦海와 같다.”하고 표현하잖아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휘몰아쳐 오는 거친 파도에 휩싸여도, 이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조금씩 건너편 생명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과 갈망이 없다면 그 여정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6,17) 그들만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배를 타고 떠납니다. 떠나는 그 시간이 바로 어두운 저녁이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그 자체가 우리네 신앙 항로에서 ‘어둠의 때’이고, 이 어둠이 다가오면 우리 내면에서부터 ‘두려움과 불안’이 서서히 일어나서 우리를 휩쓸 만큼 강한 바람으로 불어오고 거친 파도처럼 덮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란, 곧 교회를 상징함을 즉각적으로 느끼실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는 교회는 지금 어두운 가운데 도달해야 할 빛과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항해하는 중입니다. “그때에 큰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 (6,18) 예수님은 아니 계셨습니다. 이런 상태였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하였다.”(6,19)하고 묘사합니다. 이 광경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 (13,26) 하고 직접적으로 제자들의 반응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상이 가잖아요. 밤중에 그것도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물 위를 걸어오신 분이 설마 예수님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지하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두려운 존재로 인지하고 더 무거운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게 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전에 저는 혼자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 제 엄마가 다가오면서 ‘무서워하지 마, 엄마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다. 아, 이젠 살았다. 무섭지 않아’라고 말했던 기억과 그때의 느낌이 새롭게 되살아납니다. 이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6,20)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4,18)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기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친 사랑으로 참된 평화와 위안을 충만히 만끽하였습니다. 이는 부활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충만한 평화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인생 항해에서도 예수님의 ‘현존과 부재’로 인해 때론 위안을 때론 위험을 겪을 수 있지만 마침내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부재 가운데서도 당신의 성사적인 현존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다 보면, 혼자 버려짐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함께함의 평화를 느낄 때 이내 사라지고 평온과 안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체험이 바로 부활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 두려움에서 평화로 자신들이 안정을 되찾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했습니다.” (6,21)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평화와 평온을 되찾은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굳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미 부활의 선물인 평화로 가득 찼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도 주님의 현존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않아도 신앙적 차원에서 이미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눈과 손길을 돌리신 순간은 한순간도 없습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시33,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