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물 위를 걸으시다.>_송영진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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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3 | 조회수20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파도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빵의 기적 이야기’와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
사이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빵의 기적 이야기’의 결론 역할과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요한 6,15),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둘러서 제자들을 군중에서
분리시키셨고, 그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마태 14,22; 마르 6,45).”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마도 몹시 어수선하고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빵의 기적’ 때문에 크게 들뜬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들어서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할 때(아우성칠 때), 제자들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군중과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자들은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청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시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우선
먼저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고, 그리고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셨는데, 뒤의 22절을 보면,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그들의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고, 꽤 오래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만난 ‘큰 바람’과 ‘파도’는,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군중의 분위기에
크게 흥분된 상태였을 것이고, 또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셨을까?” 라는 의문과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신 것에 대한 실망감 같은 것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큰 바람’과 ‘파도’는
제자들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진정제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은,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으면서,
또 예수님에게서도 떨어져 있으면서 어둠 속에서
배를 저어 가면서 차츰 흥분이 가라앉았을 것이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좀 더 신앙이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때도 있고,
그 어려움들 덕분에 어떤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들 자체가 은총은 아니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해지고 도약하는 것은 은총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고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연계도 지배하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임금이 되기를 청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가셨을까?
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22절).
만일에 타고 가실 배가 있었다면?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 깨달음은 뒤의 68절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일과 밤에 호수에서 큰 바람과 파도를
겪은 일과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일이 합해져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크게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그냥 단순하게 “저희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라는 말을 먼저 한 것은, “빵을 배불리 먹이겠다고 약속하는
세속의 임금들에게는 가지 않겠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만을 따르겠다.” 라는 다짐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4)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 다가온다고 생각해서
겁에 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태 14,26; 마르 6,49),
요한복음에는 그 말이 없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몰라서 무서워한 것과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무서워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무서워하지 마라.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라는 뜻이고, 요한복음에서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왔으니, 나를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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