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원수를 사랑할수 있을까/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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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3 | 조회수16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찬미예수님!
어떤 남자가 하느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 처녀들은 상냥하고 예쁘고 귀여운 데, 왜 마누라들은 하나같이 악마같이 덤비고 말대꾸하고 그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느님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셨어요. ‘처녀는 내가 만들었고, 마누라는 네가 만들었다.’ 정답이에요, 아니에요? 그 악을 바락바락 쓰는 마누라도 처녀시절이 있었겠죠? 상냥하고 귀엽고 예뻤던 시절이 있었을 것에요.
또 반대로 얘기하겠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저를 찾아와 남편의 잔소리가 심하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수십 년을 듣다보니까 이제는 원수 같데요. 그리고 자기도 많이 변해 같이 싸운대요. 아이들 생각해서 헤어질 수는 없고, 신부님 방법이 없습니까? 이런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사실 많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제 입을 통해서 똑같은 답을 주시는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자매한테는 사제관에 가서 루르드 기적수를 작은 통에 담아와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기적수를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돌아올 무렵이면 입에 물고 있으라고 했어요. 남편이 어떤 말을 하든지 귀한 기적수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면 큰 죄라고 했어요. ‘신부님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도 하십시오. 따지지 마시고.’
한 일주일 있다가 그 자매가 얼굴이 환해져가지고 왔어요. 시킨 대로 기적수를 입에 물고 남편을 기다렸더니, 웬걸 똑같죠! 신발 벗으면서부터 잔소리, 밥하는데 옆에 와서도 뭐라고, 뭐라고. 그런데 입에 기적수를 머금었으니 대꾸를 할 수가 없잖아요? 대꾸하려고 하니 기적수가 흘려요. 신부님이 땅바닥에 흘려도 안 된다고 했으니, 옆에서 뭐라고 해도 꾹 참았데요. 첫날은 남편이 재미가 나는지 더 달달볶더래요. 둘째 날도 똑같이 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공도 주고받는 사람이 있어야 던지죠? 싸움도 던지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는데 받는 사람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아무튼 일주일 그 방법을 썼는데, 차츰 남편이 제풀에 죽어 잔소리를 안 하더래요. ‘입에 뭘 물었어?’ 하면서.
이제는 남편이 귀가하면 정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밥 먹을 준비한대요. 그러면서 ’기적수 더 안 물어도 되겠죠? 해서, ‘한 달 더 무세요.’ 했어요. 한 달 동안 루르드 기적수를 입에 물게 했어요. 남편은 잔소리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평상시에는 부인 말에 퉁명스럽게 대하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스럽게 대해주었대요. 세상에! 남편이 칭찬하는 소리도 결혼 수십 년 만에 처음 들어 봤데요. 부인도 남편이 달라진 데 대해 매우 만족하고 그리고 행복해 했죠. 그리고 저한테 와서 ‘신부님, 루르드 기적수라 다르긴 다르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자매님, 기적을 일으킨 것은 루르드 기적수가 아닙니다. 전에는 당신이 말대답하면서 남편을 짜증나게 했지만 이제는 당신이 침묵으로써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한 것,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우리는 사실 큰 것 가지고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작은 것 갖고 그것이 쌓이면 원수 같은 마음을 갖게 되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대로 되갚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구약의 법 가운데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을 성서학적으로 볼 때 동태복수법, 혹은 동일복수법이라고 해요. 네가 받은 것만큼만 주라는 그 뜻이에요. 무절제한 복수를 할까봐 네가 복수하는 선은 여기까지다‘ 하고 정한 것이죠. ‘다른 사람한테 손가락 하나 다쳤으면 손가락만 건드리고 발가락까지 건드리면 안 돼.’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말은 자비였습니다. 무절제하고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 그것이 한계라는 거였죠. 그런데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반드시 복수해야만 되는 법으로 알았어요. 예수님은 그러면 안 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오늘 얘기하시죠.
인간의 사랑에는 크게 두 가지, 에로스적인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내가 주는 것만큼 되받고 싶다 그 뜻입니다. ‘내가 이정도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너도 나한테 분명히 표시를 해 줘야 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 돼. 사랑받고 싶소,’ 그 뜻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한계가 있고, 불확실합니다. 어릴 때 엄마사랑에 만족하던 자식들이 애인이 생기면서 그 사랑에 만족 못 합니다. 이때 어머니는 당신 사랑의 한계를 느낍니다. ‘아 이것까지구나, 이제는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또 불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순간에 교통사고로 사라질 수 있고, 병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사랑했던 이에게 아주 처절한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한두 번씩은 겪어야 되는 일들이죠. ‘우리 같이 죽자.’하면서 극약을 같이 먹어도 숨이 끊어지는 시간은 다릅니다. 이렇게 에로스적인 사랑은 한계가 있고 불확실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은 없을까? 아무도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있습니다. 한계도 없고 확실한 사랑은 있습니다. ‘무조건 주겠소, 눈곱만큼도 되돌려 받을 마음이 없소’.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죠.
어머니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그림자라고 그럽니다. 하느님이 세상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에 대신 일하라고 엄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려고 기찻길로 뛰어들어 자식은 밀어내고 즉사를 합니다. 기차가 등위를 밟고 지나갈 때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새끼 살려야 돼.’ 철길에서 놀고 있는 우리 아기 밀어내고 엄마는 죽습니다. 그때는 아무 조건이 없는 겁니다.
부모가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집에 불이나서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자식이 둘이 있어. 그때 부모는, 아버지는 뛰어듭니다. 소방대원이 말릴 시간도 없이 내 새끼 살리려고 온 몸에 불이 붙고 화상을 입어도 자식을 담요로 둘둘 말아서 양손에 안고 나와서 죽을 수 있는 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불이 얼마나 뜨거울 까 화상 입어 얼마나 흉한 몰골이 될까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을 죽인 원수를 수양아들 삼아 옥바라지를 하는 사람을 저는 봤습니다. 지극정성 옥바라지하고 나중에 정말 친모자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분도 봤습니다. 이것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 이득이 없어도 자기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는 사람을 봤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주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의지의 사랑이지 정(情)의 사랑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 좋아.’, 이것은 의지가 아니라 그냥 느껴지는 감정, 정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기도하는 자에게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군더더기 다 떼어버리고 두 가지 때문이죠. 첫 번째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용서해줘야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상처준 것조차 기억을 못 합니다. 대부분은 상처를 받은 사람만 상처를 끌어안고 피를 흘리고 삽니다.
일 년 전에 동창 모임에서 어느 자매가 대화를 하다가 상처를 깊이 받았어요. 잊어버렸다 생각하면 생각나고, 그래서 일 년 만에 용기를 내서 전화를 합니다. ‘너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일 년 전에 네가 나한테 한 그 말 듣고 너무 힘들었다.’ 그러면 ‘너 참 보기보다 속이 참 좁구나. 어떻게 그 말 가지고 상처를 받아?’ 오히려 말 안 하는 것만 못 할 때가 많아요. 다시 말하면 상처 준 사람은 상처 줬다고 생각 안 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여러분이 받은 상처는 돌에 새겨놓지만, 여러분이 준 상처는 대부분 기억도 못 해요. 그러니 내 마음의 돌에 새겨져 있는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대신 때가 되면 하느님이 벌주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을 믿어야 해요.
미움에 가득 차 있을 때는 당연히 복수심에 불타게 되죠.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균형을 잃고 나중에는 자기의 영혼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위장병, 심장병, 불면증, 식욕감퇴 등 대부분 이런 병들은 마음에 분노가 있을 때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체험으로 터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할 때는 평화가 왔었던 경험을 우리는 압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 사람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그대로 살다가 죽어라.’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내게 악한 행동을 하지만, 저 사람도 변하게 도와주십시오.’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들의 복수심은 상대방의 악행을 증가시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정복합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몰아낼 수 없고, 미움을 미움으로 몰아낼 수 없고 폭력을 폭력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와야 사라지고 악은 선이 들어와야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황금률(Golden Rule)을 얘기하십니다. ‘네가 바라는 대로 그대로 해 주어라.’ 며느리가 밉다고 동네방네 며느리 흉보고 다니면 그 며느리는 점점 더 못 돼집니다. 그러나 못 되고 부족한 며느리라도 우리 며느리 최고라고 칭찬해보세요.
그 칭찬의 소리가 돌고 돌아서 며느리 귀에 들어갑니다. ‘세상에, 제대로 해 드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를 칭찬하고 다니신데.’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꾸짖거나 혼내거나 뒷말을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고 그 인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말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 겁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첫 발을 어떻게 디뎌야 됩니까?’ 내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딱 한 마디 하셨어요. 원수를 향해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원수를 위해 기도해라. 쉽지 않죠. 원수를 위해 어떻게 생미사를 드려주고, 어떻게 축복의 묵주기도를 드려 줘? 그래도 분노의 감옥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려워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느 자매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자기도 원수가 있대요. 대녀인데, 돈 열흘만 빌려달라 해서 피같이 모은 3천만 원을 빌려줬더니 도망쳤대요. 그 다음부터 심장병 등 온 몸이 병이었데요. 그런데 피정에 내 강론 듣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대녀위해 기도 시작했대요. 레지오 주회를 나가 프레시디움 단장이니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까지 잘 했대요. 오늘 이 기도는 ‘돈 떼어먹고 도망간 대녀를 위해서 성모님 봉헌합니다.’ 하면서 지향을 두고 성모송 하기를 시작했는데, 일이 터진 것에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그 순간에 대녀 얼굴이 자기 앞을 획 지나가는 것에요. 자기도 모르게 ‘은총이 가득하신 이 년아 기뻐하소서.’ 단원들이 ‘단장 미쳤나? 성모님한테 이 년아 했나? 피정 갔다 오더니 돌아버렸네.’
신부님, 기도랑 욕이 같이 나오는데 그래도 해야 됩니까? 하세요. 처음에는 기도와 욕이 같이 나오고 묵주 들고 그 인간을 위해 기도하다가. ‘미쳤어, 내가 그놈을 위해 기도를 다하고’ 묵주를 집어 던질지언정 다시 집어서 하란 말이에요. 주님의 기도 하다가도 그놈 얼굴만 떠오르면 욕이 나올 수 있어요. 그래도 중단하지 말고 하셔야 됩니다. 하다 보면 나중에 분노와 욕은 사라지고 온전히 기도만 남는 때가 올 것에요. 바로 그때가 치유되는 순간이에요. 아멘
그래서 용서의 첫 단추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위해 기도를 시작하는 것에요. 쉽지는 않지만 그리고 여러 번 유혹이 올지 모르지만 끝까지 하다 보면, ‘세상에! 이제는 미워지지 않아. 이제는 그 사람을 기도해도 축복의 마음 밖에 안 드네. 치유가 정말 많이 됐네.’ 그런 마음이 들 거라는 것입니다.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내 잣대가 아니라 사랑의 잣대로 사랑을 재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 중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미워하는 사람, 원수가 있다면 그 원수를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19년 연중 제7주일(02/23)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PS: 본당 주보에 신부님 교리가 매주 올라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찾아서 같이 나눕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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