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허물은 기억하지 않고_반영억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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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4 | 조회수16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내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길에서 겪은 일, 즉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 풀이를 해 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졌던 일,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체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내로 참아 주시며 눈높이 사랑, 맞춤 사랑으로 마음을 열어주시며 일깨우시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의 말씀 전례 안에서 주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성찬 전례를 통해 마음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체험을 합니다. 따라서 자주, 정성껏 미사 참례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왜 몰라봤을까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예언한 바대로 되살아나셨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증거하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지금 삶의 자리에서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 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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