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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묵상 시리즈 제25강] 율법과 십계명 3/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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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4 조회수153 추천수0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부활 대축일을 잘 보내셨죠?

그리고 우리는 부활 8부 축제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율법과 십계명에 대한 강의 2편까지 했고 내용은 4계명까지 묵상했지요.

오늘은 십계명 중 5계명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그러면 너희 하느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

 

여러분들 아주 짧지만, 이것을 한 번만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다섯 번, 되풀이해서 천천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읽다 보면 부모와 나 사이에 주고받았던 상처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시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먼 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나 엄마, 또 자식한테서 받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주고받은 상처들은 또렷이 기억나는 것도 있지만,

무의식 속에 잠겨 있으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신부님, 그래서 ‘부모님을 공경하라. 그러면 너희 하느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를

네 번 다섯 번 읽어봐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십계명 가운데 특별히 이 5계명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외우실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중얼중얼하듯 하다 보면,

아버지와의 갈등 문제, 엄마와의 갈등 문제, 이런 것들의 어둠이 점점 점점 물러가는 힘이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번 읽다 보면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의문도 떠오릅니다.

‘부모에게 공경해야 하는 건가?’

또 새로운 발견도 하게 될 겁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밝혔고요.

이어서 우리에게 부모 공경할 것을 십계명은 즉, 하느님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즉, 이 5계명을 6번째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으로 두지 않고, 무심코 다섯 번째로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공경하라’라는 계명은 반드시 다섯 번째에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꼭 다섯 번째에 놓아야 하기에 다섯 번째 계명으로 하느님께서 놓으신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중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보다 불가사의하고 밀접한 관계는 없습니다.

맞죠?

아무리 부모를 싫어하고 경멸해도 내가 지금 인간으로서 사는 것은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 인간은 자기 이외에 누구에게서도 태어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 이외에 누구에게서도 태어날 수 없다는 얘기죠.

우리는 의외로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하고 거기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별로 신비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쌍의 남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또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태어난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흔한 사건은 아닌 겁니다.

만일 부모가 그날 밤 화합하지 않고, 전날 밤이었거나 다른 날이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죠?

3억 6천에서 6억이나 되는 정자 중 하나가 난자와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한다는 것은 아시죠?

이게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만일 이 몇억의 정자 중에 딴 정자와 결합하였다면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내 부친과 내 모친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면 지금의 나는 아닐 겁니다.

맞죠?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합한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몇 가지 예를 통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에 더욱더 자기 존재를 겸허하게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우리는 대학 진학할 때 어느 과는 10대 1이다, 20대 1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공무원 시험 볼 때도 70대 1을 뚫고 합격했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몇조 대 일’이라는 확률이 맞아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70대 1, 80 대 1, 100대 1의 확률을 뚫은 것이 아니라, ‘몇조 대 1’의 확률을 뚫고 내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죠?

내가 잉태되는 그날 밤, 바로 아버지 엄마가 사랑을 나눴던 그날이 전날이었다면, 아니 다른 날이었다면

내가 태어날 확률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자 수억 개인데, 그 수억 개 중에서 현재 나를 만든 그 정자가 아니라 다른 정자가 난자와 합쳐졌다고 해도

지금 내가 없는 거죠.

아무튼 이렇게 따져보면 입시 몇십 대 일, 시험 몇십 대 일과는 비교가 안 될 확률을 뚫고 내가 태어난 겁니다.

그건 기적이죠. 기적입니다.

아버지나 엄마와 갈등을 빚었을 때 반항적으로 얘기를 하죠.

‘누가 낳아달라고 했나, 뭐?’ 이런 식의 경박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탄생의 신비를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태어난 것은 아무리 부탁해도 되지 않는 엄숙한 사실입니다.

신의 허락이 없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얼굴로 부모에게 반항하고 또는 부모를 멸시하면서 자랄 수 있습니다.

 

필경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제5계명에 반발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있습니다.

‘아니 공경받을 상태가 돼야 공경하는 것이지 그게 어떻게 무조건 공경하는 겁니까?’

제가 처음에 십계명 얘기할 때 특히 4계명에서 좀 쓴웃음을 지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사제 서품 때도 새 신부들에게 주교님이 묻는다고 했죠.

‘주교에게 순명과 존경을 바치겠습니까?’

순명은 조직 사회이니 바칠 수 있지만, 존경은 존경하라고 해서 존경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존경받을 그릇이 돼야만 상대가 존경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얘기를 듣고 반항심이 생기는 사람은

분명히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못 미치는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5계명이 굉장히 거북하고 반항심을 갖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정말 무식해, 이런 무식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 공경할 수 있단 말이오?’

또 ‘우리 어머니같이 어리석은 사람 또 어디 있을까? 절대 존경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

실제로 세상에는 정말 이름만 부모지 무지막지한 그런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버리는 어버이도 있고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욕심꾸러기 아버지도 있고요.

그리고 폭행을 일삼는 어버이가 있고, 엄마 내보내서 돈 벌어오게 하고 빈대처럼 살아가는 아버지도 있고,

조금 많이 안다고 다른 사람 업신여기는 그런 어버이도 있고요.

색욕에 빠져서 바람만 피우고 다니는 그런 부모들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절대로 존경받을 수 없는 부모를 갖고 있는 자식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는 얘기죠.

저는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복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전능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만 있다면,

어떠한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다는 매우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거 하나만 가지고도 어떤 부모이건 간에 부모를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저는 생각을 합니다.

 

5계명은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뿐이지 거기에 어떤 단서를 달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해라. 그러나 좋지 못한 부모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단서는 없습니다.

마치 에페소서 5장에 나오는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이런 말씀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도 분명히 단서가 붙지 않습니다.

‘좋은 남편에게는 주님께 복종하듯이 하고, 나쁜 남편에게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단서를 쓰지 않았죠.

진실하지 못하거나 바람둥이거나 주님에게 복종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잘 수긍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왜 단서를 붙이지 않으셨을까?

성경에 ‘부모에게 공경해라, 또 남편에게 순종해라. 단, 이런 사람에게는 순종할 필요 없다.’ 이러면은 훨씬 좀 사는 게 편할 텐데.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저는 이 말씀에서 정말 심오한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해라.’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결국에 ‘단서를 붙이지 않고 오로지 공경하라. 복종하라’라는 말씀의 내면에는 ‘

진심으로 경외하고 복종하기만 하면 그 뒷일은 하느님이 책임지고 모든 것을 잘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의미구나 하는 것을

제가 깨달았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못된 남편 존경받지 못할 부모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계명이니 공경하려고 애쓰고

또 주님 대하듯 남편 대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뒷일은 내가 책임질 것이다.

그러니까 나 한번 믿어보고 내가 일러준 계명 그대로만 한번 살아보려고 애를 써봐라.’라는 뜻이구나

하는 것을 제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책임하게 명령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부모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를 놀라울 정도로 회복시켜 주실 것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전에 본당 신부 할 때 가출한 아가씨가 어디 갈 데가 없다며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식복사랑 같이 있게 한 적이 있었는데

가출한 이유는 아버지의 바람기를 더 이상 자식으로서 지켜보는 것이 지옥 같아서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너무너무 밉다. 자식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을까. 그런 아버지 다시 보기 싫으니 어디 식모라도 취직시켜 주십시오.

사제 생활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찾아오죠.

저는 그 처녀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무조건 귀가해서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존경하도록 성경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부친을 존경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가 없기에 가출한 그 젊은 그 처자에게

아버지를 용서하고 존경하라는 요구는 무척이나 어려운 요구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처자는 내 말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죠.

그리고 며칠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신부님이 시킨 대로 가출했던 것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고 이제 다시는 가출하지 않겠다고 하며

가출한 이유를 분노하지 않고 차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듣던 아버지가 ‘딸아, 나를 용서해 다오. 내가 정말 나빴다.

지금부터는 참으로 좋은 아버지가 되겠으니 날 한 번만 믿어다오. 이 애비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신부님 기뻐해 주세요.

아버지 입에서 달라지겠다는 말씀이 나오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달라지겠다는 그 말을 듣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성당에 나갔습니다.

그랬는데 허물없이 이야기한 적도 없던 사람들이 그날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이상하지요? 나의 마음이 변하면 저쪽도 역시 변하나 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실감으로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저부터 열심히 변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던 겁니다.

 

자기가 겸손하게 부친을 대할 때 부친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열매입니다.

아버지가 변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하느님이 역사하신 겁니다.

 

피정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신부님, 부부가 원만하게 사는 비결을 오늘 강론해 주셨는데 좀 더 가슴에 와닿게 얘기해 주실 수 없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장가도 안 가본 내가 그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들으셔야죠. 더 이상 제가 뭘 어떻게 얘기합니까? 나보다 더 잘 아실 텐데.’

하면서 내가 이런 말을 해드린 것 같아요.

‘성경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고 하지 않았냐,

만일 남편이 도둑이어서 아내에게 망 보고 있으라고 말하면 잠자코 망을 보고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현명한 척 ‘도둑질은 악한 것이니 집어치워라.’ 하며 남편 멱살을 잡고 ‘나를 망보게 해?’하며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극단적으로 도둑질할 때 망을 보라고 해서 망을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에게 복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는 마음가짐의 아내들은 모두 부부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또 좋아질 겁니다.’

 

그랬더니 또 한참 있다가 편지를 받게 됐죠.

‘신부님 저 기억하십니까?

한 열흘 전에 식사하는 자리에서 남편에게 순종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물었던 사람입니다.

그때 신부님이 남편이 도둑질할 때 망을 보라고 하면 망까지 보는 순명을 해야 한다고 해서 거부감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저는 올해 결혼 생활 20년 차 주부입니다.

남편과 이혼하려고 수십 번 마음도 먹었고, 정말 냉랭한 생활이지 따뜻한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그때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만일 남편이 도둑이어서 망을 보라면 그렇게 하라는 말씀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차차 그전의 착하고 현명했던 남편으로 되돌아오고, 우리 가정은 위기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신부님 말에 저항감을 가졌지만, 그럴 정도로 각오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니

남편은 더더욱 미안해하면서 사람이 바뀌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저는 지금도 그 편지 받았을 때 놀라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건방진 구실이나 빈약한 경험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에 반항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면, 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의 책임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지시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그 명령에는 ‘야훼 이레’가 숨겨져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공경하면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이 존경하려고만 하면 절대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살펴보면 무엇인가 한 가지는 존경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매우 마음이 옹색하고 또 오만해서, 위대한 사랑까지도 그대로 보아주지 않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말 혹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계집종에게는 영웅이 없다.’

영웅을 시중드는 여자는 그 영웅의 약점만을 늘 보기에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들도 자기 부모를 공경하게 보는 눈을 상실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계명 다음에 나온 것은 분명 뜻이 깊습니다.

‘자기 부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이 타인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라고 말하면,

즉시 ‘아닌데? 나는 내 부모는 존경하지 못해도 존경하는 사람 많아. 우리 부모는 존경받을 수가 없어.

내가 부모 존경 안 한다고 해서 내 성격이 삐뚤어진 건 아니야.’ 하면서 자기를 변호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를 존경 못 해도 친구는 존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부모처럼 늘 곁에 있질 않습니다.

만일 그 친구가 늘 내 곁에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죠.

그래서 부모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가출했던 그 처녀가 나한테 편지에서 쓴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도 정상으로 되돌아갑니다.

 

나는 이 5계명을 이처럼 해석하면서 읽었던 겁니다.

하느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겸허하게 순종해 보기로 합시다.

순종은 온전한 신뢰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로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나의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모범을

우리도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그 명령에 대한 그 후에 책임도 하느님이 지실 것이라는 믿음 갖고 명령에 대해서 토를 달면 안 된다는 얘기죠.

기적은 내가 변할 때 상대편이 기적처럼 바뀐다고 하는 것도 명심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5계명 하나만 가지고 30여 분을 얘기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6계명부터 또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하늘의 별처럼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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