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벨탑 이야기 2/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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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4 | 조회수17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구정이 며칠 안 남았죠? 여러분들 많이 바쁘십니까? 이 기간을 이용해서 여행 가시려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월정리에 가만히 있습니다. 항상 설 때는 혼자 있었죠. 지난 일요일 본가에 가서 온 식구와 미사도 드리고 연도도 바쳤습니다. 빨간 날에는 서로 이동하기가 불편해 미리 한 주일 전에 구정을 치렀습니다. 떡국 맛있게 끓이시는 분, 문 앞에 갖다 놓으시면 제가 맛있게 먹겠습니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 오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원래 말은 하나였는데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알리려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 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하늘이라고 했죠? 산을 보면 산과 하늘이 닿아 있는 것 같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역시 하늘은 멀리 있죠. 아마 그 어리석은 인간들은 산 정도 높이의 탑을 쌓으려 시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명히 하늘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죠. 하느님과 맞먹으려고 했던 거죠. 그 당시로는 아마 최고의 기술, 최신 공법을 이용했을 겁니다. 돌 대신에 벽돌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된 겁니다. 역청이라고 하면 오늘날 길에 까는 아스팔트 같은 그런 끈끈한 종류겠죠. 아무튼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신 공법, 최신 기법을 이용해서 탑을 쌓아 올라갔던 겁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했죠. ‘인간은 무엇인가를 발명할 때마다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어진다.’ 사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것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푸른 들과 산 그리고 따뜻한 태양. 비바람. 눈. 넓은 창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이 주셨던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이용하기보다는 다 망가뜨립니다. 아무튼 무엇을 발명할 때마다 어리석어지는 인간들의 모습, 이것은 바벨탑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현대에는 그 어리석음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TV에서 주로 관심 있게 보는 것이 다큐멘터리 쪽입니다. 넷플릭스에서 그런 다큐들이 심도 있게 잘 조명이 되고 있죠. 시간 날 때마다 항공기 사고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외로 항공기 사고가 자주 나죠. 그 프로그램 보고 난 다음에는 사실 비행기 별로 타고 싶지 않습니다. 작은 나사 하나, 금속 피로라고 그러죠? 겉으론 멀쩡한데 속에서 쇠가 오래되어 곯은 거죠, 그 나사 하나 때문에 수백 명이 죽기도 하고, 또 기장과 부기장의 실수 때문에 죽기도 하죠. 아무튼 조사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비행기 자체 결함보다 조종사들의 실수가 더 크다고 해요.
기장과 부기장이 똑같은 조종간을 잡고 있는데, 기장이 혹시 뭔가 잘못했을 때 부기장은 기장 명령을 듣지 않아도 비행기를 살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 부기장이 검사하니 조금 이상이 있어서 기장한테 비행기 떠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기장이 그 정도는 상관없으니 출발하자고 명령하고, 떠올랐던 비행기는 10분 만에 떨어져 수백 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또 인간들이 만든 여러 가지 무기와 미사일로 증오하지도 않았던 생면부지의 먼 나라 사람들을 장거리에서 살상하기도 합니다. 수백 킬로를 날아가 도시를 전부 초토화하고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원한 관계도 없는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약간 고장에도 비행기 출발을 명령하거나, 또는 미사일 발사를 명령하는 것은 늘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은 늘 다수의 사람이죠. 2차 세계대전 때 약 6천만 명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라고 하는 그 한 인간의 명령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죠. 또 일본 군국주의자들 몇 사람 때문에 아시아 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죠.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명령을 내렸던 그런 사람들, 소수입니다. 토인비는 소수가 세상을 이끌어간다고 했죠. 그 소수 가운데 긍정적이고 지구촌의 선을 위한 소수가 많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야말로 악한 소수들이 이 지구촌을 망가뜨릴 때가 많습니다. 지구촌은 지금도 마귀를 닮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중(大衆)은 우중(愚衆)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수의 어두운 창조자들에 의해서 대중은 끌려갑니다. 슬프게도 사람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를 수 있는 겸손함과 강함을 일반 대중들은 갖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또 ‘나는 무신론자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약했을 때 만들어진 구시대 유물이다. AI를 만들어 낸 이 세상에 신이 어디 있느냐, 인간이 바로 신이 아니겠느냐?’라는 말도 우리들은 예사롭고 경박하고 쉽게 얘기합니다. 무사상, 무철학, 무신앙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은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한 바벨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과학의 결정체인 로켓을 타고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달나라를 갔습니다. 그리고 달에 인간의 발바닥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 도장 찍었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우주 비행사를 그만두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바벨탑 이야기는 극히 짧지만 실로 여러 가지의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저는 바벨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당시 언어가 하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탑을 쌓기 시작할 무렵 이미 사람들 안에 분열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확실히 인간은 악행을 하는 일에도 쉽사리 결속됩니다. 악의 연대성이라 하죠. 천박한 예로 말한다면 남의 험구를 할 때가 그렇습니다. 사이가 나쁜 A와 B가 공통으로 싫어하는 친구 C를 흉볼 때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됩니다. 이같이 사람은 악에 의하여도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자가 하나도 그때 당시 없었을까? ‘그거 세우면 안 돼. 그것 세우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다. 죄다.’ 이렇게 외친 자가 그 당시에 한두 사람도 없었단 얘긴가? 모두 하나같이 탑 건립을 찬성하였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외쳐도 이미 대중은 하늘에 닿는 탑 건립 계획에 더 흥분되어 있어서, 탑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반론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건가?
또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은 대체 어떤 상태였다는 얘기였을까? ‘언어 사상’이라고 말하듯이 언어가 사상일 수도 분명히 있는 겁니다.
창세기 10장 20절과 3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죠. 20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서 갈려 나간 함의 후손들이다.’ 또 31절에 ‘이상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 갈려 나간 셈의 후손들이다.’ 이 성서 구절로 봐서 바벨탑 이전에도 언어가 서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달랐다’라고 하는 이 언어는 소위 예를 들어서 일본어와 독일어의 차이,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만큼 달랐다는 뜻은 아니고 ‘방언’, ‘사투리’죠.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 정도, 서로 못 알아들을 정도의 다른 언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사투리는 있었을지라도 바벨탑을 세울 때는 말이 하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벨탑을 세울 때 말이 하나였다고 하는 것을 그냥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뭔가 이상한 냄새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혹시 ‘언어 통제’를 했다고 하는 뜻은 아닐까? 다른 말로 사상통제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파고든 것일까요? ‘말이 하나였다’라는 뜻은 그냥 글자 그대로 ‘똑같은 언어를 쓴다’라기보다는, 다른 말이 나오지 못하게끔 어떤 힘이 언어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언어 통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이런 해석을 저는 해보게 됩니다.
제가 ‘바벨탑 이야기 1’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힘 있는 권력자가 바벨탑을 쌓자고 한 것이다, 일반 대중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불순한 생각이 나올 리가 없다. 마치 히틀러라고 하는 광인, 무솔리니, 스탈린, 김일성이 같은 괴물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였듯이, 뭔가 이 바벨탑 시대 때도 국민 전체가 ‘우리 바벨탑 쌓자’,가 아니라 어떠한 힘 있는 권력자가 나타나서 언어를 통제하면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게 힘으로 누르며 바벨탑을 쌓아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0장 8절과 9절에 인간 세계의 권력자가 등장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스에게서 니므롯이 났는데 그는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그는 야훼께서도 알아주시는 힘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야훼께서도 알아주시는 니므롯 같은 힘센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니므롯이라고 하는 힘센 사냥꾼. 이 사람에 의해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 하느님과 맞먹으려 하는 세력’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물론 니므롯과 이 바벨탑과는 많은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니므롯이라는 권력자의 등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면서 바벨탑에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한 사람 힘에 의해 불순한 생각이 만들어진 것이고, 또 ‘한 언어였다.’라는 말뜻은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게끔 언어 통제를 했다고 하는 뜻이 아닐까 묵상하게 됐습니다.
전쟁이 일으키거나 승리해 식민지를 만들면 제일 먼저 언어와 사상을 통제한다고 합니다. 우리 일제 36년 긴 세월 식민지로 살면서 일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창씨개명이죠. 또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한국말을 못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사람에게만 강요했던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도 적성 국가인 미국 말을 전혀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언어의 통제만이 아니라 천왕을 살아있는 신으로서 여겼죠. 만일에 이것에 반기를 들거나 반대하면, 즉시 투옥되거나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국가가 사상통제를 하고 전쟁에 분주한 모습과 바벨탑을 세우는 모습에서 공통점을 보게 됩니다. 특히 신 아닌 인간을 신이라고 하는 ‘천왕’도 바벨탑 건설 동기에 해당하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일본은 패전으로 그 잘못이 고쳐졌죠. 신이 아닌 자를 신으로 올려 앉히는 것보다 인간을 더 모욕하는 일은 없습니다. 패전 후 천왕은 인간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라 나는 인간이다.’ 여러분들,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그 천왕이 행복했겠습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은 인간 이하 짐승 취급을 당할 때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인간 이상으로 취급받는 것도 역시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알려주는 성서의 말씀은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배신하려고 할 때 반드시 하느님은 그것을 중단시키신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에 있어서 바벨탑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가슴속에 바벨탑 세우신 적 없습니까? 또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계신 분들 있겠죠. ‘내 가슴속에 신이 없다. 내가 최고다. 신이 있을 수 있느냐?’ 이런 불순한 생각은 바로 내 마음속에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바벨탑 이야기는 ‘세상이 하나의 언어로서 뜻을 모은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언어는 인간을 얽매어 놓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은 못 된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벨탑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 각 가정의 모습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열렬한 연애했던 연인이 결혼하고 석 달도 안 되어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고 얼어붙어 냉랭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엄마, 엄마’ 하면서 따르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동시에 엄마와는 말을 뚝 그치게 된 이야기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죠.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 며느리와 시누이 사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 형과 아우 사이 등 마음이 잘 통하지 않는 사이가 허다합니다. 말을 끊어버린 그런 상태죠. 식구가 몇 되지도 않는데도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외국 사람들과 사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 안에서도 언어가 없어집니다, 대화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 과연 언어인지 의문이 듭니다. 바벨탑과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시초에는 서로 협력했겠죠. 그러나 차츰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자기주장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 부당한 의지 통일이 하느님의 자비로 저지되었으니 사실 결과적으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설령 말이 같았다고 해도 자기주장만 강조하고, 제멋대로 굴고, 싸움만 하려고 하고, 이렇게 완전히 의견 불통이 되니 타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들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한번 응시해야 합니다. ‘신의 영역을 범하려고 부정하게 세우려던 그 탑과 성을 내 마음 안에 혹시 세우고 있는 적은 없었던가?’ 정직하게 한번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응시해야 할 겁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그들은 결국에는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로 돼갑니다. 자기 안의 우상을 세울 때는 다른 사람과의 단절이 이루어집니다. 가족과의 단절,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내 안에 있는 바벨탑을 허무는 것은 겸손이고 회개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내 안에서 커가는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작업, 그 무너뜨릴 때 다이너마이트는 말씀이고 성체의 힘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렇게 바벨탑 이야기 이제 두 편으로 이제 끝을 내고 다음 주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딸들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12장부터 20장까지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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